인더뉴스 이진솔 기자 | ARM이 미국 그래픽 처리 장치(GPU) 생산 업체 엔비디아에 인수된다는 소식에 반도체 업계가 술렁이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간 무역 분쟁이 치열한 상황이라 인수·합병(M&A) 과정에서 두 국가간 셈법이 주요 변수로 떠오를 전망입니다.
지난 13일 엔비디아는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으로부터 ARM 홀딩스를 최대 40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역대 최대규모 반도체 업계 M&A입니다. 엔비디아 측은 18개월 이내에 모든 절차를 완료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인수는 규모뿐만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산업에 전방위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ARM은 삼성전자나 퀄컴처럼 자체 상표가 붙은 제품을 내놓진 않지만, 설계에 필요한 지적재산권(IP)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꼽힙니다.
특히 강점을 보유한 분야는 스마트폰을 포함한 모바일 반도체입니다. 전 세계 스마트폰 반도체 중 약 90%가 ARM 설계도에 기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전력량이 낮은 스마트폰 반도체 설계 역량을 살려 사물인터넷(IoT)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반도체 시장이 미국과 중국 간 기술냉전 최전선에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막대한 시장 점유율을 가진 ARM을 손아귀에 넣는 것은 대중국 제재를 위한 새로운 압박 수단을 갖게 되는 셈입니다.
지난 5월 화웨이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ARM과 거래를 중지하면서 신제품 출시가 미뤄지는 타격을 입었습니다. 중국 내에서 설계되는 반도체 95%가 ARM 기술에 의존하는 만큼 제재가 부과될 경우 피해는 불가피할 전망입니다.
엔비디아가 ARM을 품으려면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독점규제 당국으로부터 승인을 거쳐야 합니다. M&A 조항에 담긴 구체적인 옵션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상황으로는 중국이 승인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습니다.
엔비디아와 ARM도 중국과 척을 지게 되면 타격을 입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소프트뱅크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기준 중국이 ARM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로 적지 않은 규모입니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사업으로 집중하는 인공지능(AI) 및 서버용 반도체 시장에서도 중국 기업들은 대형 고객입니다.
ARM으로부터 설계도를 공급받던 삼성전자와 퀄컴 등 기업들도 긴장하는 모양새입니다. 각 업체는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ARM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왔습니다. 이번 인수로 실질적 경쟁자인 엔비디아 산하로 ARM이 넘어갈 경우 예전과 같은 신뢰를 구축하기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 간 ‘기술 냉전’ 속에서 갈등의 빌미가 하나 더 늘었다는 점에서 업계는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라이선스와 IP 영역까지 정치 문제가 파고들면서 생기는 불확실성이 가장 큰 문제”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