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찬 심리상담사ㅣSBS 드라마 <김부장>SBS 드라마 <김부장>(연출: 이승영, 이소은/극본: 남대중/출연: 소지섭, 최대훈, 윤경호, 주상욱, 손나은, 서수민 외)은 자기 이름보다 '가장'이라는 무게를 먼저 짊어지고 살아온 아버지의 삶과 책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아버지가 지녀야 할 힘은 무엇일까.
"아빠는 왜 내 말 안 믿어?"
드라마 <김부장>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린 민지(서수민 분)는 아버지 김부장(소지섭 분)에게 묻는다. 김부장은 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기도 전에 상대 부모에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 그의 반응은 자녀의 말을 먼저 듣기보다 눈앞의 문제를 빨리 수습하는 것을 아버지의 책임으로 여기는 익숙한 모습을 보여 준다.
김부장은 외동딸 민지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가족을 위해 희생해 왔고, 위기가 닥치면 가장 먼저 나서려 한다. 그러나 바로 그 강한 책임감 때문에 딸의 말을 듣지 못한다. 아버지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딸은 정작 자신의 편이 되어 줄 아버지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혼자 남겨졌다고 느낀다. 부모가 사랑하는 마음과 자녀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경험은 언제나 같지 않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요구한 것은 말보다 책임이었다. 가족을 위해 일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은 아버지의 조건으로 여겨졌다. 아버지의 사랑은 말보다 희생으로 증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자녀는 경제적 부양뿐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고 감정을 알아주는 아버지를 기대한다. 아버지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권위적이어서는 안 된다. 자녀와 가까워야 하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전 세대에게서 배운 역할과 오늘날 자녀가 요구하는 역할 사이에서 많은 아버지가 당황스러워하는 이유다. 김부장 역시 가족을 위해 싸우는 법은 알았지만, 딸의 마음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처럼 변화하는 자녀의 필요에 맞추어 아버지 자신도 성장해야 한다는 관점을 ‘생성적 아버지됨(Generative Fathering)’이라고 한다. 아버지됨을 이미 완성된 지위가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계속 배워 가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다. 아버지는 자녀를 낳는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자녀의 필요에 응답하고,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태도를 바꾸며, 관계 속에서 자신도 함께 성장해 간다. 그러므로 좋은 아버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만이 아니다. 그 일이 지금 자녀에게 정말 필요한 일인지도 물어야 한다.
드라마 초반 민지에게 필요했던 김부장의 모습은 "아빠가 해결할게"라는 말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들을게"라는 태도였다. 자녀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자녀의 주장을 무조건 사실로 확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판단하기 전에 자녀가 겪은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두려움과 억울함을 충분히 듣겠다는 뜻이다. 자녀를 믿는 일은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그의 경험부터 듣는 데서 시작된다.
자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끊지 않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녀의 감정을 빨리 달래거나 없애려 하지 않고 곁에서 견디는 것, 자녀의 행동 뒤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 부모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드라마는 이후 김부장이 이미 지니고 있던 또 하나의 힘, 곧 딸을 보호하는 힘을 보여 준다. 민지가 납치되자 김부장은 목숨을 걸고 딸을 찾아간다. 마침내 딸 앞에 나타난 그는 말한다.
"아빠 왔다. 이제 집에 가자."
김부장은 자녀를 위험에서 구하는 강한 보호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빠 왔다"는 말은 단순한 구출에 머물지 않는다. 딸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이며, 이제부터 그 고통을 함께 감당하겠다는 선언이다. 애착이론에서 부모는 자녀가 두렵고 힘들 때 돌아와 기댈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다.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은 자녀의 삶에서 모든 위험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위험 속에서도 자신이 돌아가 기댈 사람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있다.
다만 딸을 구했다고 해서 곧바로 딸을 온전히 이해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악당과 싸우는 일은 극적이지만, 집으로 돌아와 딸의 말을 끝까지 듣는 일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딸이 겪은 두려움과 분노를 받아들이며,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일에는 더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딸을 구해 내는 힘이 김부장이 이미 지닌 능력이라면, 딸의 말을 듣는 힘은 그가 새롭게 배워야 할 아버지의 능력이다. 그래서 김부장이 딸을 구한 것은 아버지 역할의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드라마 <김부장>에서는 김부장과 주강찬(주상욱 분)이라는 두 아버지를 대비시킨다. 두 사람 모두 딸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한다. 그러나 한 아버지는 딸 곁으로 돌아가 함께 현실을 감당하려 하고, 다른 아버지는 권력을 이용해 딸이 마주해야 할 현실 자체를 지워 버리려 한다. 주강찬은 딸의 잘못을 권력으로 덮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 겉으로는 보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녀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성장할 기회를 빼앗는 왜곡된 보호다.
자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자녀가 원하는 대로 모두 해 주는 것과 다르다. 말의 표면적인 요구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두려움과 죄책감을 살피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고 성장해야 할 필요까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건강한 아버지의 보호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네 행동의 책임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어 주지는 않겠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결과를 대신 지워 주는 일이 아니다. 자녀가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관계를 끊지 않고 그 과정을 함께 견디는 일이다. '생성적 아버지'는 자녀를 대신해 살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녀가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곁에서 돕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힘은 드라마 <김부장>의 아버지들처럼 자녀를 대신해 싸워 주는 데만 있지 않다. 자녀의 말을 믿고, 감정을 함께 견디며, 어긋난 관계를 다시 이어 가는 데서 아버지의 힘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늘날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권위가 아니다.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듣는 힘, 자녀의 감정을 함께 견디는 힘, 무너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힘이다. 김부장의 "아빠 왔다"는 약속이 단순한 구출에 머물지 않으려면, 이제는 "먼저 듣지 못해 미안하다"는 고백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녀의 경험과 마음을 끝까지 듣는 태도로 완성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힘은 바로 그 듣기에서 다시 시작된다.
■ 최옥찬 심리상담사는
"그 사람 참 못 됐다"라는 평가와 비난보다는 "그 사람 참 안 됐다"라는 이해와 공감을 직업으로 하는 심리상담사입니다. 내 마음이 취약해서 스트레스를 너무 잘 받다보니 힐링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주 드라마와 영화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찾아서 소비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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