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박경보 기자ㅣ지난해 내수 최하위에 머물렀던 한국지엠이 새해 들어 기지개를 활짝 켰습니다. 주력 신차인 ‘트레일블레이저’가 출시되면서 회사는 물론이고 본사가 위치한 인천까지 덩달아 들뜬 분위기입니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18년 한국지엠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8100억 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부평공장에서 만들어지는 트레일블레이저는 당시 GM이 한국 배정을 약속한 신차 2종 가운데 하나인데요. 창원공장에서 생산될 신형 CUV는 2022년쯤 출격할 예정입니다.
그간 한국지엠이 생산하는 승용차는 말리부와 스파크, 그리고 트랙스가 전부였습니다. 이마저도 노후화된 차종들이라 ‘신차’ 출시가 절실했었는데요. 트레일블레이저는 트랙스 이후 7년 만에 투입된 신차인 만큼, 한국지엠 경영정상화를 가름할 핵심차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트레일블레이저 출시 행사에는 이례적으로 노조 집행부와 지역구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는데요. 이날 김성갑 한국지엠 노조위원장,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 차준택 부평구청장 등은 함께 손을 잡고 한국지엠의 앞날을 응원했습니다.
회사의 경영정상화라는 중책을 짊어진 트레일블레이저는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소형 SUV에 속합니다. 체급이 비슷한 기존 트랙스는 향후 2년 안에 단종되기 때문에, 사실상 트랙스의 후속모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시승행사 전까지만 해도 신차에 대한 기대감이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쉐보레’라는 이름은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과 빈약한 편의사양 탓에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아왔던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트레일블레이저는 ‘비인기 브랜드’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듯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트레일블레이저는 한국 소비자들의 취향과 선호도를 잘 이해하고 있는 ‘국산차’입니다. 연구·개발 전 과정과 생산을 한국지엠이 맡은 만큼, 한국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상품성을 두루 갖춘 것이 특징인데요. 크게 세 가지를 꼽자면 동급에서 가장 큰 차체와 대폭 강화된 첨단 편의사양, 그리고 납득할 만한 가격입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전장 4410mm, 전고 1635mm, 전폭 1810mm, 휠베이스 2640mm의 크기를 갖고 있는데요. 최대 경쟁자로 꼽히는 기아차 셀토스보다 전장은 35mm, 전고는 25mm 더 큽니다. 전폭과 휠베이스도 각각 10mm씩 더 여유롭습니다. 트레일블레이저가 셀토스로부터 ‘동급 최대 크기’라는 타이틀을 완벽하게 빼앗아 온 셈이죠.
이 같은 제원은 차체 크기와 실내공간에 민감한 한국 소비자들을 공략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투싼이나 코란도 같은 준중형 SUV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기존 소형 SUV에 부족함을 느꼈던 소비자에겐 좋은 선택지가 될겁니다.
선택트림을 세분화시켜 다양한 소비자들의 취향을 만족시킨 것도 칭찬할 만한 부분입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기본 모델과 RS, ACTIV(액티브)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판매되는데요. RS가 스포티함을 강조했다면, 액티브는 SUV 고유의 오프로더 감성을 살렸습니다.
이번 시승차는 액티브 모델이었는데요. 가장 놀랐던 건 순정사양으로 온·오프로드 겸용 타이어가 적용됐다는 점이었습니다. 트레일블레이저에 적용된 한국타이어의 다이나프로 AT-2는 지프 랭글러, 쌍용 렉스턴 스포츠 등 정통 오프로더에 주로 쓰입니다.
소형 SUV에서 이 타이어를 ‘순정’으로 만나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요. 특히 국산차의 경우 소음과 승차감 등 감성품질을 위해 순정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입니다. 실제로 경쟁차종인 셀토스는 순정 타이어로 ‘마제스티 9’을 쓰고 있는데요. 고급 대형세단에 들어가는 컴포트 타이어를 통해 감성품질을 개선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트레일블레이저의 액티브 모델은 타이어 외에도 다양한 디자인 요소로 SUV 특유의 거친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X자 형상의 전면 프로텍터, 범퍼 하단의 크롬 스키드플레이트, 듀얼 머플러 등이 대표적입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디자인 뿐만 아니라 파워트레인도 이원화돼 있습니다. 1.2ℓ, 1.35ℓ 가솔린 터보엔진은 각각 무단변속기와 맞물리는데요. 가격과 연비가 중요하다면 1.2ℓ 모델을, 좀 더 파워풀한 동력성능을 원한다면 1.25ℓ모델을 고르면 됩니다.
하지만 경쟁자인 셀토스(1.6ℓ터보)보다 엔진 크기가 작은 것은 트레일블레이저의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보면 쉐보레 올란도가 기아차 카렌스를 눌렀던 적이 있는데요. 올란도의 배기량이 카렌스보다 높았던 게 승부를 가른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국내 소비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스펙’에 예민하기 때문이죠.
저 역시 트레일블레이저를 직접 몰아보기 전까진 ‘심장병’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데요. 막상 액셀레이터에 발을 얹으니 답답함보다는 경쾌함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저속에서는 물론 고속영역에서도 답답함 없이 주행할 수 있었는데, 때에 따라선 셀토스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미 이 엔진은 중형세단인 말리부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성능이 검증됐는데요. 최고출력 156마력, 최대토크 24.1kg.m의 힘을 발휘하는데, 자연흡기 2.0ℓ 엔진인 쏘나타보다 출력은 4마력 떨어지지만, 오히려 토크는 4.1kg.m 높습니다. 중형세단과 힘은 비슷하면서도 공차중량은 가볍다 보니 거동이 상당히 경쾌한 편입니다.
특히 시승차는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과 결합된 9단 자동변속기가 탑재돼 있었는데요. 제때제때 신속하게 변속되면서 고속주행 때도 알피엠(엔진회전수)가 낮게 유지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알피엠이 치솟는 경우가 별로 없다 보니 실내에 유입되는 엔진음도 중형세단 수준으로 조용했습니다.
다만, 엔진음이 줄어드니 풍절음과 노면소음이 잘 들리는 편입니다. 특히 앱티브 모델은 온·오프로드 겸용 타이어를 장착해 하부소음이 좀 더 부각됐는데요. 하지만 기분 나쁠 만큼 소음이 거슬리진 않았고, 전반적인 주행감성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트레일블레이저의 첨단 안전·편의사양 역시 쉐보레 브랜드 중에선 최고 수준인데요. 차선 이탈 경고 및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 전방충돌 경고 시스템, 전방 거리 감지 시스템, 전방 보행자 감지 및 제동 시스템, 저속 자동 긴급 제동 시스템 등 첨단 안전사양들이 LS트림부터 기본 적용돼 있죠.
그간 쉐보레는 ADAS(첨단 운전자보조시스템) 사양이 부족한 탓에 국내 시장에서 판매에 어려움을 겪어왔는데요. 하지만 트레일블레이저는 주행 중 앞차와의 간격을 자동으로 유지하고,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스티어링 휠도 알아서 제어했습니다.
트레일블레이저는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등 ADAS 사양 외에도 파노라마 선루프, 핸즈프리 파워 리프트게이트, 헤드업 디스플레이, 보스 프리미엄 사운드 시스템 등의 고급 사양들도 두루 챙겼습니다. 핸즈프리 파워 리프트게이트의 경우 쉐보레는 물론 동급차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능인데요. 게다가 무선으로 스마트폰을 연결해 애플 카플레이를 쓸 수 있습니다.
워낙 기대치가 낮았던 탓인지 트레일블레이저에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요.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아쉬운 부분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실내 내장재의 품질은 여전히 싼티가 많이 나고, LT·프리미어 트림은 운전석에만 통풍시트를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옥의 티입니다.
특히 트레일블레이저의 차선유지보조 기능은 경쟁차종들에 비해 성능이 떨어집니다. 요즘 국산 신차들은 스티어링 휠에서 손을 떼더라도 차로의 중앙을 따라 자동으로 주행할 수 있는데요. 트레일블레이저는 ‘절대’ 손을 떼면 안됩니다. 차로를 따라 주행하는 것이 아니라 차선이탈을 막는 수준이기 때문이죠.
이 때문에 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경우 차량은 차로 안에서 지그재그로 춤을 춥니다. 한쪽 차선에 바퀴가 닿으면 반대쪽으로 다시 밀어넣는 개념인데요. 요즘 차들의 ADAS가 ‘편의사양’이라면, 쉐보레의 ADAS는 지극히 ‘안전’을 위한 사양인 셈이죠.
◇ 총평
트레일블레이저는 그간 쉐보레가 보여줬던 기존 제품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품성이 높았습니다. 국내 시장에 최적화된 편의사양과 차체 크기, 감성품질, 동력성능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었는데요.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차종인 만큼, 공을 많이 들인 티가 곳곳에서 묻어났습니다.
특히 기본 1995만 원부터 시작하는 판매가격도 만족스럽습니다. 시승차인 앱티브는 2570만 원, RS는 2620만 원인데요. 셀토스도 최대 2685만 원(디젤)까지 올라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납득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간 터무니없는 가격 정책으로 “판매할 생각은 있냐”는 비아냥까지 들었던 것에 비하면 매력적인 가격표임이 분명합니다.
특히 트레일블레이저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치가 낮았던 점은 오히려 판매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르노삼성이 다음달쯤 XM3를 선보이면 트레일블레이저는 셀토스와 함께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 전망인데요. 트레일블레이저는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충족시킨 국산차인만큼, 오랜만에 쉐보레의 ‘폭풍질주’를 기대해봐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