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박경보 기자ㅣ자동차업계에 놀랄 만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4일부터 사전계약에 들어간 더 뉴 그랜저가 하루 만에 1만 7294대나 계약됐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진기록입니다. 사전계약 최다 기록은 그랜저IG(1만 5973대)가 가지고 있었지만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이 갱신하게 됐죠.
더 뉴 그랜저는 풀체인지도 아닌 페이스리프트(부분변경) 모델입니다. 일각에서는 “마름모랜저”라고 비아냥대고 있지만 계약량이 몰리는 건 그만큼 소비자들의 기대감이 높다는 뜻일 겁니다. 현대차는 “신차급으로 변화한 더 뉴 그랜저가 국내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며 한껏 고무된 모습입니다.
1만 7000여 대가 얼마나 대단한 기록이냐고요? 국내 완성차업체인 르노삼성, 쌍용차, 한국지엠은 지난달 각각 8401대, 8045대, 6394대를 팔았습니다. 내수 3·4위의 월간 판매량을 합쳐봐야 그랜저가 하루에 기록한 사전계약량에 못 미친다는 겁니다.
현행 그랜저는 지난 2016년 11월 첫 출시 이후 줄곧 월간 1만대를 넘기며 사실상 국민차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랜저’라는 이름값, 풍부한 편의사양, 넓은 실내공간, 그리고 3000만원 초중반의 합리적인 가격 덕분입니다.
최근엔 싼타페와 쏘나타가 치고 올라오면서 그랜저의 인기가 다소 시들해졌는데요. 이번 사전계약량을 보니 신형 그랜저는 단숨에 베스트셀링카 자리를 탈환하게 될 것 같습니다. 계약량이 많으면 출고가 늦어질 수 있으니, 구매를 망설였던 소비자들도 계약을 서두르게 될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건 이 같은 ‘사전계약’이 단순히 마케팅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비자들의 구매 심리를 자극할 뿐, 실질적으로 사전계약 고객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더 뉴 그랜저의 사전계약 프로그램을 볼까요. 현대차는 200명을 추첨해 나파가죽 시트 등 인기있는 옵션을 무상 장착해줄 예정인데요. 사전계약 고객이 2만명 수준이라고 쳐도 1%만 혜택을 받게 됩니다.
더 중요한 건 계약순서대로 출고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전계약하면 남들보다 먼저 인도받지 않냐고요? 그건 원하는 옵션과 트림, 색상이 이미 생산된 물량 중에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수의 영업망에 확인해보니 그랜저와 같은 인기 차종을 ‘주문 생산’할 경우 출고까지 기본 수개월이 소요됩니다.
사전계약을 통해 초기 생산 물량을 빠르게 받는다고 해도 썩 개운치만은 않습니다. 신차의 초기 물량은 결함이 발생할 확률이 크기 때문인데요. 실제로 지난 4월 출시된 신형 쏘나타의 초기 물량에서 진동, 소음 등이 발견돼 출고가 연기됐었죠. 사전계약자가 제조사의 ‘베타테스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특히 사전계약 때는 제원이나 성능, 판매 가격 등이 정확하게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번 사전계약 때 알려진 더 뉴 그랜저 2.5 모델의 가격(프리미엄 등급)은 3294만~3344만원인데, 최종 가격은 출시일에 공개됩니다. 현재로선 구체적인 디자인 역시 알아보기 힘듭니다. 내·외관의 일부만 공개됐으니까요.
현대차는 속 보이는 사전계약 전략을 지난 7월 베뉴 출시 때 스스로 드러냈습니다. 당시 현대차는 기대 이하로 부진했던 베뉴의 사전계약 성적을 끝까지 함구했는데요. 반면 사전계약 첫 주 2만여 대가 계약된 팰리세이드는 사전계약 고객들의 연령대와 선호 트림까지 전부 공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신차가 나왔을 때 구체적인 정보 없이 덜컥 계약부터 한다면 제조사에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습니다. 차를 어떻게 내놔도 잘 팔린다면, 제조사로선 품질에 신경을 곤두세울 이유가 없을 겁니다. 팰리세이드만 하더라도 출시 이후 지금까지 계기판 경고등 오점등, 터치스크린 불량 등 고질병에 시달리고 있죠.
이런 점으로 비춰볼 때, 사전계약보단 6개월 정도 뒤에 신차를 구입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3만원짜리 티셔츠를 살 때도 몸에 잘 맞는지 입어보고 사는데, 시승은커녕 실물 확인도 못 해보고 수천만원짜리 자동차를 사도 되는 걸까요? 자동차 업계를 출입 중인 기자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