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정 농촌사회학자ㅣ지난봄 이사를 했다. 서울 동북부 끝자락인 이 동네는 1983년 충청도에서 올라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생때까지 살던 곳이다. 돌아가신 엄마와 다니던 재래시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고향 같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동네 시장 구경에 나섰다. 혹독했던 여름, 전통시장 상인들이 너나없이 고난이었다. 유사 이래 경기가 좋았던 적은 없었지만 올해는 기후위기 문제가 일상을 깊고 파고들어 특히 농산물과 과일에 악영향을 끼쳤다. 아직 푸르뎅뎅한 생대추가 억지로 제수 용품 구색은 갖추었지만 ‘밤 깎아드립니다’라는 팻말을 보니 저장 알밤은 넉넉한 듯하여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이 시장의 독특한 풍속이라면 건어물과 과일, 떡 가게에서 명절 즈음 차례상에 올릴 과자들을 잔뜩 진열해 두는 것이다. 북어를 기본으로 약과, 산자, 옥춘당, 팔보당, 종합젤리, 스낫드, 킹구하스 같은 어원도 모호한 과자들이 여전히 팔린다. 제수용 과자들은 색감이 화려해서 눈에 바로 뜨이기 마련이다. 제사나 차례를 지내는 이들도 줄어들고 제수용 과자를 올려두는 일은 더욱 드물 터이지만 찾는 이들이 있으니 상인들이 마련했을 터이다.
고향 같은 이 동네는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농촌을 떠나 떠밀려온 이들을 품어준 곳이다.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낮은 축이어서 다들 한 번 살러 들어왔다 떠나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동네로 꼽힌다. 추측건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풍진 세상 건너 나온 노인들이 해오던 대로 차례상에 과자를 올리는 풍속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여기에 더해 동네 골목마다 희고 빨간 서낭기를 걸어두고 점을 치고 복을 가늠하는 점복사들이 많아 연말연초와 명절에 제물로도 여전히 용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동네 떡집 역시 여전히 제수용 백설기를 많이 쪄낸다는 귀띔이다.
돌이켜보니 명절 차례에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세계가 없었다. 집성촌이었던 친가 외가 모두 나이보단 항렬이다. 증조부모에서 뻗어 나온 일가친척들이 동네에서 앞뒷집에 살았으므로 차례도 순서대로 지냈다. 아침 댓바람부터 시작한 차례로 대여섯 집을 돌다 보면 마지막 집의 명절 차례는 점심 즈음에 걸리기도 한다. 아이들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설날에 세배나 추석에 인사를 하면 어린 우리들 손에는 둥근 동전이 아닌 둥근 다식을 쥐어졌다. 심지어 깨다식도 아니고 콩가루를 뭉친 콩다식은 콩송편만큼이나 인기가 없었다.
큰집에 가면 할머니는 벽장에서 '옥춘당'이나 '팔보당'을 내주곤 하셨다. 고향 사투리로 '옥출'이라 옥춘당은 들러붙어 있어 가끔은 망치로 깨서 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손주들을 귀애하는 할머니의 방식에 따랐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입에서 우물우물 빨곤 하였다. 이미 그 옥춘당에는 벽장 특유의 곰팡이 냄새까지 덧대어져 단물이라면 환장했을 어린 나이였어도 참 싫었다.
옥춘당보다 더 난감한 사탕이 팔보당이다. 설탕을 굳혀 오방색 색소를 넣은 팔보당을 회갑이나 칠순 잔치 때 장식용으로 높게 쌓는 고임상 용도로 쓰인다. 옥춘당은 그나마 박하 맛이라도 나지만 팔보당은 맛이랄 것도 없다. 당이 떨어져 급하게 먹는 포도당 사탕 맛이 딱 팔보당 맛이다. 옥춘당과 팔보당에는 진한 색용 색소가 들어가 있어 이 사탕들을 입에 빨고 나면 입 주위가 불그죽죽해져서 전설의 고향에서 보던 딱 저승사자 분장 같았다. 마침 제사상에 올라가는 사탕이라 하여 '저승사탕'이라고도 불렀으니 용도가 묘하게 맞아떨어지긴 하였다.
기실 제사나 차례를 갖추어 지내는 것도 여력이 있는 양반 중에서도 고관대작들이나 가능한 일이었을 뿐, 조율이시니 주과포혜니 주절댈 형편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과자는 귀물 중에서도 귀물이었다. 생존을 건 음식도 아니고 눈과 혀가 즐겁자고 먹는 과자는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다. 하여 조선시대에 태어난 할머니에게 옥춘당과 팔보당은 단연 귀한 것들이었고 벽장에서 서생원(쥐)가 슬쩍 건드렸어도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옥춘당과 팔보당 말고도 수박모양과 무지개모양을 낸 '쩨리'나 꽃분홍색 웨하스과자 모양인 '킹구하스', 쿠키 모양이지만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스낫드'가 있다. 상표명 자체가 그 과자 자체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요즘은 아예 옛날과자로 통칭되는 이런 제수용 과자들은 생산하는 공장들도 몇 남지 않아 본의 아니게 독과점 업체가 되었다. 외에도 산자와 강정, 약과, 다식 등 죽은 이들을 위한 밥상에는 이런 화려한 과자들을 올려놓았다. 제사상만이 아닌 잔칫상에도 맨 앞줄에는 색이 화려한 과자와 과일이 차지했다. 지금 말로 바꾸자면 사진발 잘 받으라고 맨 앞줄을 차지했나 싶을 정도로 인공적인 색감으로 눈길을 훔치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 이 당속(糖屬)들의 주요 임무였다.
우리나라의 과자는 크게 한과(韓菓)와 양과(洋菓)로 나눈다. 제사상에 흔히 올라가는 강정이나 산자, 약과, 다식이 한과다. 그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제사와 명절이 없다면 한과의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 약과가 큰 유행을 타면서 한과에 대한 관심도 다소 높아지는 듯 싶다. 옛날과자로 통칭하며 경험삼아 제수용 과자를 먹어보고 후기를 남기는 콘텐츠들도 올라온다. 젤리나 옥춘당, 스낫드와 킹구하스는 엄밀히 따지자면 양과자지만 용처는 한과에 가깝다.
이걸 재미 삼아 맛 삼아 먹는 이들이 신기할 뿐이다. 특히 약과를 주요메뉴로 내는 디저트카페가 생기기도 하고 고급과자류로 취급되어 꽤 값이 나가는 약과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다. 하지만 약과 외에는 점점 제상에 올리는 한과는 물론 한과처럼 인식된 양과자들은 그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십대와 이십대 초반인 우리 집 아이들에게 ‘산자(馓子, 糤子)’를 물어보니 처음 들어보았다 할 정도로 낯선 과자가 되었다.
우리집 제상에도 한참 전부터 제수용 과자는 빠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 상 물리면서 바로 음식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도 죄스러워서 하나둘씩 빼다 보니 그나마 남은 것은 약과와 산자다. 과자 귀퉁이 조금 떼서 먹어보고는 냉동실에 굴러다니다 버려지기 일쑤지만 그래도 과자 하나 올리지 않는 제상은 어딘지 쓸쓸해서다.
단 번도 맛있지 않았던 옥춘당과 팔보당마저 아련한 것을 보니 명절이 다가왔고 떠난 이들이 그리운 모양이다. 대목을 앞두고 분주한 그 시장 복판, 어린 마음에 관심도 없던 제수용 과자들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으니 말이다. 추억은 참 질기다.
■정은정 필자
농촌사회학 연구자. <대한민국치킨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뿌리다 –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등을 썼다. 농촌과 먹거리, 자영업 문제를 주제로 일간지와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그림책 <그렇게 치킨이 된다>와 공저로 <질적연구자 좌충우돌기>, <팬데믹시대, 한국의 길>이 있고 <한국농업기술사전>에 '양돈'과 '양계'편의 편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