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5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사실상 유일한 국가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사십대는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오롯이 겪은 세대이자 한국 사회의 정확히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인더미들 in the middle]은 인더뉴스가 한국 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사십대들의 삶과 일, 그리고 꿈꾸는 미래를 들어보는 인터뷰 입니다. 세대의 가교이자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십대들의 진솔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을 조율하고 해법을 찾는데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나를 당당하게 만드는 성취를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구의 딸, 아내, 엄마가 아닌 오롯한 내 이름으로 누리는 인정을 포기하기 싫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95p>
출판사 마음연결에서 최근 선보인 에세이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는 이제 마흔 초반을 넘어선 민선정 작가의 두 번째 책입니다. 몇 해전 같이 글쓰기 공부를 했던 지인들과 함께 <퇴근할까 퇴사할까/더블유미디어>를 낸 이후 실제로 퇴사를 감행하고 서울에서 제주도로 가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일상을 또박또박 담아냈습니다.
11월 중순 서울 종로에서 만난 민 작가는 "4년간 제주살이로 서울의 높은 빌딩들에 이제 적응이 잘 안 된다”며 “서울에 올 때마다 제주의 자연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서울 종로 일대는 민 작가가 회사를 다니면서 숱하게 지나쳤던 거리임에도 어느덧 낯선 풍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역의 명문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해 종로구 명륜동에서 대학을 다닌 민 작가는 법대생이었지만 사법고시는 딱히 끌리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언론사 입사도 준비했지만 명함을 얻게 된 곳은 이른바 대학생 선호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국내 대기업의 금융계열사였습니다.
민 작가는 "처음 입사하고 했던 업무가 손해사정이었는데 해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특히 저 때문에 팀 전체의 고과 평가가 낮아지는 시스템 속에서 고민이 참 많았다"고 털어놨습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 초반부에는 민 작가의 직장생활 이야기가 주로 담겨있습니다. 민 작가가 팀의 인사고과 평점을 낮추는 어리바리했던 신입사원에서부터 결국 같이 입사한 동기들 가운데 가장 오래 다니고 승진도 빠를 것이라는 평판을 뒤로 두고 15년 근속을 채운 후 퇴사하는 과정을 적었습니다.
"회사에서 배운 것도 적지 않았고 또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했지만 결국 행복한가?’ 라고 자문해보면 여기에서 확답을 내리기 쉽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학때 온라인 닉네임을 '내가 바라는 나'로 쓸 만큼 무언가 내 스스로를 위해 성취 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편인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하고 또 복직하는 과정에서 여러 갈등을 겪으면서 '내가 바라는 삶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더 강해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나'에서 '내가 바라는 삶'으로의 전환은 민 작가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해서 가족 공동체를 꾸리는 이들이 경험하는 인생의 큰 변화입니다. '나'란 단어에는 오직 하나의 개인만이 존재하지만 '삶'이란 단어에는 나를 둘러싼 가족들까지 아우르기 때문입니다.
민 작가는 육아휴직 기간 중 제주살이를 통해 아이가 자연과 교감하며 감수성을 키우고 온전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잊고 있던 행복과 삶의 가치들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회사에서의 성취와 맞바꿀 수 없는 가족의 시간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입니다. 다시 복직을 하고 일에 매진했지만 회사나 혹은 서울의 시간표가 '가족의 시간'을 수용하기에는 여전히 여유가 없었습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민 작가는 사표를 쓰겠다는 결심을 굳힙니다. 제주로 내려가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고 선언합니다. 맞벌이하던 남편은 아내의 결정을 기꺼이 존중해 주고 제주와 서울을 오가야 하는 주말부부 생활을 감내해 주었습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는 이처럼 지금 한국 사회의 중추로 꼽히는 40대 맞벌이 부부들이 겪는 육아 및 회사 생활의 생생한 애환들이 잘 녹아있습니다. 이른바 '워라벨'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기업 현장에서는 '일과 가정의 양립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경우가 아직은 더 많습니다. 민 작가는 그 과정에서 겪었던 감정의 질곡들을 담담히 적었습니다.
이 외에도 줄 세우기 위주의 입시경쟁에 속에서 어떻게 해야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가? 고민하는 엄마의 고민도 나누고자 했습니다. '대안적인 삶'으로 꼽히는 제주살이의 구체적인 경험담을 통해 제주살이를 고려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책을 낸다고 인생이 확 달라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책을 쓰는 과정에서 어떤 조직의 직책인 내가 아니라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 마음에 닿도록 진솔하게 쓰는 작가'로 스스로 재정의할 수 있었고 내가 우선하는 가치를 지켜가는 삶을 살 방법을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민 작가는 밀레니엄 세대라 불리는 00학번입니다. 졸업과 동시에 직장생활을 시작해 2009년 결혼을 했고 2011년 딸을 낳았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워킹맘'이었고 인생의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사십대 입니다. <여유가 두려운 당신에게>는 민 작가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동시대 같은 세대들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물론 민 작가처럼 '여유'를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마다 놓인 처지가 다른데다가 민 작가는 자신의 선택을 지지해주는 남편과 아이, 양가 부모님들이 있었습니다. 민 작가 역시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여유’를 선택한 데 따른 반대급부를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장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의 진로를 위한 고민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남편에게만 '생계'를 맡겨 놓기엔 남편 어깨가 너무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 세대들이 다양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또 그런 모습에 힘을 얻는 후배 세대들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퇴사해서 갑자기 행복해졌다기보단, 제 안의 불안과 걱정을 깊게 마주하며 답을 찾는 시간을 가진 덕분에 지금의 행복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분들에게 그런 제 경험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필요성을 부정하진 않지만 돈이 또 시간과 마음을 잡아먹어선 안 된다는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