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제3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된 것을 온 국민과 함께 축하합니다.”
지난 2009년 6월 26일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스페인의 세비아에서 대통령의 축전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본 심사에서 다른 국가들로부터 이례적이란 뒷말이 나올 만큼 진행된 지 15분 만에 등재결정을 받아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덕분입니다.
유네스코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조선왕릉,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이로써 우리는 모두 9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문화국가로서의 자긍심을 한층 더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며 “이제 인류 공동의 문화유산이 된 조선왕릉을 더욱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은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양식으로 세계유산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고 지금까지 제례의식 등 무형의 유산을 통해 역사적인 전통이 이어져 왔으며,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는 점 등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유네스코의 높은 평가와 함께 대통령의 축하 및 관리에 대한 다짐을 이끌어 낸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이 최근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조선왕릉 40기 중에 한 곳인 김포 장릉 주변에 지어지는 아파트와 이에 대한 반대 국민청원과 이에 따른 논란이 커지고 있어서 입니다.
특히 이번 '김포 장릉 아파트 사태'는 단순히 건설사가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한 사례로만 보기에는 꽤 중요한 문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한국과 중국, 일본이 유네스코를 무대로 벌이고 있는 동북아 문화주도권 경쟁에서 자칫하면 한국에게 약점이 될 빌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김포 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습니다. 이 글은 청원 열흘 만인 27일 오전 현재 12만 7000여 명이 동의했고 청와대가 공식적인 답변을 해야 하는 20만 명 청원 동의 도달도 어렵지 않은 상황입니다.
김포 장릉 경관 및 조경 훼손하는 아파트 공사 반대 청원
김포 장릉(사적 제202호)은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가 부모인 원종과 인헌왕후를 모신 능입니다. 청원인은 “김포 장릉은 파주 장릉-김포 장릉-계양산으로 이어지는 조경이 특징이나 봉분 앞 언덕에서 계양산쪽을 바라보면 아파트들이 빼곡하게 들어와 조경을 심하게 해친다”고 지적했습니다.
청원인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이를 받지 않고 지어진 건축물”이라면서 “위 아파트들이 그대로 그곳에 위치하게 된다면 위와 같은 문화유산등재기준을 충족한다고 보기 어려워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심하게 떨어질 것이다”고 우려했습니다.
청원인은 또한 “아파트를 그대로 놔두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로 남아 위와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면서 “장릉 쪽으로 200m 더 가까운 곳에 지은 A아파트는 최대한 왕릉을 가리지 않도록 한 쪽 방향으로 치우치도록 지어졌다. 좋은 선례가 있었음에도 나쁜 선례를 새로 남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김포 장릉 주변 아파트 공사가 장릉의 경관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이달 초 문화재청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문화재청은 김포 장릉과 인접한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내 아파트 신축 중인 3개 건설사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아울러 문화재청은 이들 건설사에 대해 10월부터 공사 중단을 통보했습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들 건설사는 문화재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반경 500m 내 최고 25층·3400여 가구 규모 아파트를 지으면서 사전심의를 받지 않았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상 문화재 및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 반경 500m 내에는 7층 높이인 20m 이상의 건물을 지으려면 문화재청의 현상변경 심의를 받아야 합니다.
문화재청 허가를 받지 않고 건물을 짓는 경우 공사 중단 또는 원상복구 명령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3개 건설사들은 모두 아파트 가장 위층(20~25층)까지 올린 뒤 내부 마감 작업 중입니다. 건설사들이 법을 무시하고 ‘나 몰라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보호법, 건설사들 알고도 모른 척?
문화재청은 지난 7월 이들 건설사가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공사중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건설사들의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인용하면서 문화재청은 기존 명령을 직권 취소한 뒤 재처분했고 다음 달부터 공사를 중단하라고 통보했습니다.
건설사들은 지난 2014년 해당 아파트 용지를 매각한 인천도시공사가 김포시청에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신청했다며 문화재청의 조치가 가혹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토지매매와 무관하게 문화재보호법상 건축물을 지을 때는 문화재 현상변경 신청뿐만 아니라 허가를 받는 것이 원칙이라고 반박합니다.
실제로 문화재보호법 제90조(건설공사시의 문화재 보호)를 비롯해 시·도별 문화재 보호조례 등에 따르면 건설 공사 시 문화재에 대한 영향을 검토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절차는 문화재 주변지역에 대한 건축행위를 심의 · 허가하는 행위로써 건축법 제11조(건축허가)에서 정하고 있는 건축허가와는 별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건설사 입장에서는 문화재청으로부터 현상변경 및 허가를 받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서울 성북구 정릉 제6구역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조선 태조의 비인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사적 제208호) 일대는 지난 2008~2010년 무렵 재개발 및 아파트 건축 붐이 한창이었습니다. 정릉을 마주하고 있는 정릉 제6구역은 조합이 설립됐고 건설사가 아파트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9월 문화재청 사적분과와 세계문화유산분과 합동위원회는 “정릉 주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경우에는 현대적이고 획일화된 높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인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정릉의 역사 문화적 특성과 경관을 크게 훼손할 우려가 높다”는 이유로 인해 정릉 제6구역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조합의 문화재 현상변경 심의 신청을 부결했고 결국 정릉 제6구역의 재개발과 아파트 신축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건설사와 인천도시공사, 김포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한 곳인 김포 장릉 주변에 건물을 지으면서 문화재 현상변경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절차를 외면하고 공사를 방조, 진행했기에 초유의 아파트 철거 상황까지 오게 됐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건설사들이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한 정황을 벗어나긴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건설사들은 막대한 소송 비용을 치러야 합니다. 아파트를 허무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더라도 설계 변경과 공사 지연에 따른 입주 예정자들의 피해는 불가피해 보입니다.
죽은 조상 무덤보다 산 사람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김포 장릉 사태를 놓고 왕릉을 직접적으로 훼손한 것도 아니고 장릉에서 보는 풍경을 가렸다는 이유로 거의 완공된 아파트를 철거한다는 것은 억지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청이 김포 장릉 문제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이유도 꽤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선 조선왕릉은 북한에 있는 2기 외에 남한에 있는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왕릉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예외적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먼저 각 지역으로 산재해 있는 한 왕조의 사후 공간 전체가 같은 날 한꺼번에 등재된 것은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유네스코 등재 실사 당시 외국 학자들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선정릉(사적 제199호)을 보면서 도시 개발의 압박 속에서도 능을 유지한 한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유네스코 심사보고서는 조선왕릉마다 각자 다른 이야기가 내려온다는 것에도 주목했습니다.
즉 조선왕릉은 한 개의 왕릉이 아니라 40개 전체를 보전한 한국의 노력과 각 왕릉마다 깃든 서사 등이 종합적으로 호평을 받아 등재신청 기간과 등재까지의 기간이 짧았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972년 처음 시작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각 나라에서 자국의 ‘문화적 영향력과 자긍심’을 나타내는 지표로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세계무형유산, 세계기록유산과 달리 역사적인 장소나 건물, 지역 등 구체적인 부동산을 주로 등재합니다. 국가별 문화적 관점뿐만 아니라 관광산업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경우 관광객 숫자가 몇 배로 늘어나는 경우가 흔해서입니다.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 일본 동북아 3개국은 각 부문 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경쟁이 치열한 상황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문화적 우월성 내지 역사적 정당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홍보하려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유네스코 내 분담금을 무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2021년 기준 중국과 일본의 유네스코 분담금 분담률은 각각 15.49%, 11.52%로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분담률이 2.92%로 10위입니다.
중국이 걸핏하면 유무형의 한국 문화유산을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 하고 일본이 한국인 징용노동자들의 원한이 서린 일본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을 2015년 세계유산에 등재시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어서 입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8월 ‘유네스코 유산 등재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과 사례 보고서’를 통해 “최근 유네스코를 장으로 하는 유산 외교(HeritageDiplomacy)가 각국의 외교전략에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며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산은 보전의 의미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내포해 자국에 유리한 관점을 국내 및 세계적으로 제시할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고 지적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였습니다.
한국은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의 부러움을 샀던 국가였습니다. 각국의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상황에서 한국은 효율적인 공략으로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종묘를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문화와 자연, 무형과 기록 등 각 분야의 세계유산을 등재시켜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포 장릉 사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국가 브랜드의 향상을 도모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악재’이며 중국과 일본 입장에서는 내심 반길 문제입니다. 즉 세계문화유산 등재 후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권고사항을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어서입니다. 중국과 일본은 이를 빌미로 앞으로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방해할 가능성도 큽니다.
4대강 사업과 뉴타운 사업을 밀어붙였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취소’는 큰 부담으로 작용해 4대강 공사현장이나 뉴타운 현장에서 문화재 현장변경 허가를 섣불리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취소 불명예 뒤집어 쓸 수도
문화 선진국이라는 자긍심이 높은 독일과 영국이지만 세계문화유산에서만큼은 감추고 싶은 사례가 있습니다. 독일은 드레스덴의 엘베 계곡입니다. 엘베 계곡은 구 동독의 드레스덴 시가 중심부를 20km에 걸쳐 가로지르는 엘베강 일대를 일컫습니다.
엘베강을 끼고 순수 녹지대와 계곡, 르네상스 시대 옛 도시유적이 잘 남아 있는 도심권이 두루 포함돼 지난 2004년 7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하지만 드레스덴 주정부가 엘베 강에 현대적 다리를 놓았고 교량 건설이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유네스코는 2009년 등재를 취소합니다.
영국은 비틀스의 도시 리버풀이 등재 취소의 불명예를 뒤집어썼습니다. 리버풀은 18∼19세기 세계 무역 중심지로서 역사적 중요성과 건축학적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받아 2004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습니다. 하지만 지난 7월 2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개최한 제44차 회의에서 '리버풀, 해양산업 도시'를 세계유산 목록에서 삭제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리버플의 세계유산 지정 지역 안팎에서 이뤄진 개발로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속성이 돌이킬 수 없이 손실됐으며 진정성과 온전함이 현저히 사라졌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독일과 영국 정부는 유네스코 등재취소에 항의를 했지만 유네스코는 이들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유네스코 내에서 발언권이 강해지는 배경에는 분담금을 많이 내는 이유도 있지만 이처럼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다른 국가들을 압박했던 서구 주요 국가들이 정작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중·일 '문화주도권 싸움'에서 약점 잡히지 말아야
‘김포 장릉 사태’는 한국 사회가 ‘문화강국’을 위해 마주한 또 다른 질문이자 도전입니다. 문화강국은 단순히 K팝과 K드라마, 웹툰, 영화 등 콘텐츠 분야의 선전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한 사회의 지성과 예술적 감성, 그리고 기술의 총체가 면면히 이어져 후대로 계승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른 사회적 합의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후 유지되었습니다. 개발의 장애물과 사유재산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지만 그래도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정권과 무관하게 정부도 문화재보호에 애를 쓰고 있습니다.
2009년 조선왕릉의 등재 당시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의 발전적 보존을 위해 일부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존과 개발압력에 따른 완충구역의 적절한 보존지침 마련․시행, 종합적인 관광계획 마련과 안내해설 체계 마련 등을 함께 권고했습니다. 정부도 이런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하기 위해 태릉선수촌 이전을 비롯한 조선왕릉 정비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김포 장릉 사태’가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당장 보이는 경제적 손실은 분명 누군가의 피해로 전가될 것입니다.
다만, 문화재 주변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법적 절차인 현상변경을 피하고 고층 아파트 건설을 강행했던 3개 건설사와 이를 방임했던 관리 감독기관의 모습은 ‘문화강국’으로 가는 데 어떤 난관이 지속될지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또한 정부가 이런 난관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자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중국과 일본이 이번 ‘김포 장릉 사태’를 보고 향후 한국을 향해 어떤 발언과 압박을 할지가 우려됩니다. ‘김포 장릉 사태’를 단순히 국내 부동산 문제로만 보기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어떤 무게인지 되짚어봐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