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주동일 기자ㅣ 강남에 위치한 클럽 ‘코미디 헤이븐’으로 들어가면 박철현(28) 씨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관객들이 쏟아내는 웃음에 목소리는 잠시 묻히기도 한다. 약 6년 전 박씨가 울산과학기술원(유니스트·Unist)을 다녔을 때부터 사람들을 웃겨온 목소리다.
박 씨는 마이크와 목소리(농담)만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런 거 해서 먹고 살겠냐”는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무대를 찾아다닌 결과 간간히 라디오에도 출연하는 번듯한 코미디언이 됐다. 박씨를 만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된 과정과 사람들을 웃기는 법을 들어봤다.
◇ 낯 가리는 공대생, 코미디언 꿈꾸기까지
- 먼저, 스탠드업 코미디가 뭔지 설명을 해주세요.
“자주 받는 질문인데 어떻게 해야 깔끔하고 멋있게 대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유행해온 콩트 코미디와 다르게. 한 사람이 혼자 무대에 나와서 소품이나 도구를 쓰지 않고 제한적인 상황에서 입담으로 웃음을 주는 코미디 장르입니다.”
- 유니스트를 나왔다고 들었는데 어떤 걸 전공했나요?
“유니스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포괄적으로는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에서 산업디자인 트랙을 공부했고, 경영학부에서 마케팅 트랙을 복수전공했습니다. 처음엔 공학자가 되고 싶어 입학했지만 막상 평생 공학자로 살겠다고 생각해보니 정말로 행복할지 의문이 들었어요.”
- 어떤 계기로 코미디를 시작했는지.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면서 진로 고민하고 있을 때 교회에서 친한 형들과 콩트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무대를 기획·구성하는 게 재밌고 적성에 잘 맞아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학해서 개그동아리를 만들어 공연을 열고 여러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학교에서 진행한 행사만 40개가 넘습니다.”
◇ 코난 오브라이언 졸업 연설 보고 시작한 스탠드업
-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스탠드업 코미디(스탠드업)를 한 거죠?
“대학생 때 미국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의 다트머스 대학 졸업 축사를 인터넷으로 우연히 봤습니다. 짧은 축사에 담긴 유머와 메세지를 보면서 ‘코미디언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스탠드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2016년 겨울 유병재씨의 길거리 공연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스탠드업이 가능하겠다고 생각했고요.”
- 실제로 유병재 씨와 만난 적도 있다고 들었어요.
“일반인 대상 강연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해 스탠드업 형식의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탑10에 들어 특전으로 병재형(유병재씨)이 참여하는 청춘페스티벌 티켓을 받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질의응답 시간에 스탠드업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고 물어봤어요.”
- 유병재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아니고, 시작한 지도 얼마 안돼서 해드릴 조언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대신 연락처를 줄 테니 같이 연락하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했어요. 스탠드업을 하겠다는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언제부터 전업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건가요?
“2017년 ‘아웃사이더’라는 한 시간짜리 공연을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렸어요. 지금 보면 부족한 점도 많은데, 현재 코미디 얼라이브(스탠드업 코미디언 중심 소속사) 대표인 정재형 대표님이 잘봐주시고 같이 공연을 해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2017년 말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바밍(Bombing) 속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살기
- 스탠드업은 어떻게 연습했는지
“보면서 참고할 스탠드업 샘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넷플릭스 등에서 스탠드업 작품을 많이 봤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 강사나 방송인들의 영상도 찾아봤습니다. 한국에서 대중들에게 웃음을 끌어낸 사례들이니까요. 그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영상들을 계속 보면서 사람들이 어떤 지점에서 웃는지 계속 봤어요.”
- 조크를 만든 팁이 있다면?
“작업할 때는 특정 아이디어가 나올 때마다 적었습니다. 계속 기록을 하다가 공연을 짤 때 A4용지에 괜찮은 농담을 하나씩 적는 거죠. 이것들을 연결해서 플롯을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완성도 있는 2~3분짜리 작품을 여러 개 짜서 옴니버스처럼 무대에 올리기도 합니다.”
-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조크는?
“콜백이라는 기술이 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데이브 샤펠(Dave Chappelle)이라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정말 잘 쓰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했던 펀치라인(웃음이 터지는 부분)을 끌어와서 다시 펀치라인으로 삼는 거죠. 콜백을 좋아해서 플롯을 길게 짜는 편입니다.”
- 공연은 매주 몇 번 정도 하나요?
“매주 두세번 정도 합니다. 일주일에 서너번씩 무대에 선 적도 있는데 기획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공연 질도 낮아지더라고요. 코미디언에게 무대에 서는 경험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컨트롤을 못할 정도로 서면 질이 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 관객 반응이 나빠서 힘든 적은 없었나요?
“바밍(Bombing)이라는 말이 있어요. 무대를 완전히 망쳤다는 은어입니다. 작년에 코미디언이 돼고 난 첫 무대에서 바밍을 겪었어요. 생각해보니 대학에서 공연을 할 땐 관객들이 모두 제 또래였습니다. 저와 공감대가 있어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관객들이 웃을지 반응을 예측하기 쉬웠던 거죠. 반면 공연장에 오는 관객은 나이·배경이 다양하다는 걸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 어떻게 극복했나요?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어요.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중 어떤 걸 소재로 삼아야 재밌을지. 저는 무대 경험이 적고 사회생활 경력도 짧아 한정된 사람들만 웃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연 전에 어떤 관객이 왔는지 보기 시작했어요. 나이·성별·소속 단체 등을 보고 관객 특성에 맞게 공연 직전까지 준비한 이야기를 계속 다듬고 바꿨습니다.”
-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꿈꾸는 이들에게 줄 팁은?
“자신이 준비한 소재가 수위나 사회적 논란 때문에 문제가 될까봐 걱정이라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리키 저베이스(Ricky Gervais) 라는 코미디언은 ‘어느 소재를 선택할지는 상관없다. 풍자의 대상이 명확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쉽게 말해 ‘동성애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도 될까’가 아니라 ‘이 이야기로 어떤 걸 풍자할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실제로 재미없이 자극적이기만 하다며 비난받는 코미디언들도 있죠.
“성적이거나 잔인한 이야기 등 무조건 수위가 높은 소재로 조크를 할수록 사람들이 웃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건 어린 아이들이 ‘내 똥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웃겠지’라고 생각하는 거랑 같아요. 정말로 웃기고 싶다면 관객으로 불특정다수가 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해주세요. 어떻게 그들을 웃길지 고민하고 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스탠드업을 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 있다면.
“농담을 준비하면서 관객들에게 기대하는 반응이 있습니다. 의도한 순간에 기대한 만큼 관객들이 웃으실 때 정말 뿌듯합니다. 스탠드업은 관객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게임 같아요. 그 농담들이 훗날 회자되는 수준까지 가면 더 좋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만족합니다.”
◇ 사람들을 일어나게 하는 건 용기보다 웃음
- 사람에게 웃음이 갖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공지영 작가의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소설에 ‘인생에서 최악의 순간이 왔을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희망이나 인내나 용기가 아니라 유머’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정말로 공감하고 좋아하는 구절이에요.”
- 실없는 농담이 대중들을 사회 문제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요?
“사람들의 분노를 없앨 수 있는 건 웃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분노를 풀고 사회 문제를 더 건강하게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분노하는 것과 문제의식을 갖는 건 다르니까요. 지금은 분노가 많은 시대에요. 저는 유머로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만드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요.”
- 끝으로 할 말이 있다면?
“늘 사람들과 헤어질 때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건강하세요’에요. 뜬금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건강해지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힘든 시대에 우린 건강해야만 해요. 그래서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