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상담사 최인우] “어머니 그 보험 필요 없어요. 어머니! 제발 쓸데없는 보험 좀 그만 드세요. 아무리 아는 사람이 와서 보험을 들어달라고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면 어떡해요.”, “너도 보험회사 다니냐? 미안한데, 너 연락 오면 부담된다. 이러다 친구 관계 깨지겠다.”
보험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강매로 떠넘겨지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보험이 딱히 필요한지도 모르겠는데, 보험이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강요에 의한 보험 가입’이었으니, 보험에 대한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보험업에 종사한다는 지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부담되기 시작했다. 오래된 친구 관계마저 서먹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보험이었다. 보험이라는 것을 내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험을 파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알게 됐고, 그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관계 때문에 보험 가입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험을 가입한 후에는 보험을 다시 해약하는 소모적인 일을 반복 해야만 했다. 나에게 보험은 강요에 의해 가입해야 하고, 인간관계상 일정기간 후에 해약해야 하는 일련의 돈과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짜증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인과 관계가 불편해지고, 마음까지 상했다.
한마디로 보험은 나에게 짜증나는, 불편한, 귀찮은 것. 그리고 인간관계를 깨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이가 30살 중반을 넘어가면서 주위에 아픈 사람들의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건강 염려증에 걸린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도 어느 순간 심하게 아프거나 사망하기도 했다.
‘삶은 고통과 행복이 뒤섞여 다가온다’라는 진리를 무시하면서 살았지만, 막상 주위에서 들여오는 고통스런 소식은 나의 삶과 건강을 생각해보게 했다. 이전에도 아픈 사람이 있었겠지만, 내 주의를 끌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보험 설계사에게 내 보험을 의뢰했다. 친구가 괜찮다고 알려 준 보험 설계사였다. 보험 설계사는 내 경제적 상황과 내가 생각하는 보험의 역할을 듣고 나서, 100세 만기 ‘소멸형 실손 보험’으로 보험 설계를 해줬다.
내가 최소한도로 인정한 보험의 역할은 ‘내가 심하게 아플 때 파탄 날 수 있는 가정 경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 정도였다. 그에 따라 설계한 보험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보험으로 인해 불확실한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확보하게 됐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나에게 보험이란 그 과정의 삶을 좀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즐길 수 있는 안전밸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