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은 보험설계사·칼럼니스트ㅣ요즘은 전문 간병인을 쓰는 일이 많다. 덕분에 간병인 사용 일당이 지급되는 보험에 관심도 커졌고 실제 가입자 수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얼마 전 보험계약을 진행하려다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 일이 있다. 바로 그 간병인 보험을 진행하려던 때다.
가입 전 알릴 의무 사전고지를 위해 고객의 과거 병력을 함께 조회하던 중, 몇 해 전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보험금이 지급된 이력이 검색되었다. 고객은 보험 처리를 한 것은 맞지만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된 적은 없다고 헸디. 당시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뼈나 조직에 큰 손상은 없었고 염좌 정도라 하루 통원 치료를 하는 걸로 종료했다는 것이다.
답변대로라면, 자칫 보험 가입 자체가 어려워질 상황이었다. 지급 이력 상세 조회 후 고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전 심사를 올린 결과 '인수'라는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가입 진행을 할 수 있었다.
간병인 보험에 가입하려던 고객에게 왜 이런 해프닝이 발생한 것일까?
이유는 '질병분류코드' 때문이다. 병원에서 진단서나 처방전을 받아보면 서류에 '질병분류기호'가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간략하게 질병코드 혹은 상병코드라고만 기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에는 '표준질병 사인 분류'라는 것이 있어 의료 기록자료 및 사망원인 통계조사를 통해 그 성질의 유사성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았다.
이 기호는 질병 및 보건 문제를 분류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설정된 것으로 주로 보험금을 청구할 때 쓰이인다. 통계청 사이트에서도 질병분류기호와 병명의 조회가 가능하다. 문제는 사람들이 보험금을 청구할 때 병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청구 신청을 하면서도 정작 질병코드는 꼼꼼하게 점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나 또한 보험업에 종사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코드를 제대로 확인해 본 기억이 없다.
간병인 보험 가입을 진행한 고객의 경우, 대수롭지 않은 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사고 당시 자신의 통증 부위를 의사에게 설명하고 검사를 받으면서 해당 질병코드가 부여되었고 그게 무릎 십자인대 파열에 해당하는 기호였다.
물론 상세 내용 조회를 통해 실제 인대 파열은 없었음이 확인되었지만, 이런 경우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있었던 워낙 경미한 부상이라 하루 정도 통원 치료를 했을 뿐이어서 고객은 상세히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날의 치료력을 코드는 인간의 기억을 뛰어넘어 기록을 해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부여된 질병분류코드는 수정이나 삭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인터넷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 보험 가입은 전부 종이 청약서를 발행해 가입자와 설계사가 하나하나 항목을 체크하며 해당 칸에 펜으로 서명을 하고 그렇게 작성된 서류를 보험사에 제출해 심사했다. 그때도 '알릴 의무'라고 해서 피보험자의 과거 병력이라든지 신체 사항 등을 기재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입자의 말, 즉 가입자의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해 작성하다보니 상세하게 조사하는 일은 어려웠다.
짐작컨데 부지불식간에 허위로 기재한 상황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보험이 보편화되면서 고객과 상담사 상호 간 지식도 상당히 쌓였을 뿐 아니라 가입 진행은 대부분 스마트기기나 모바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면서 가입자들 역시 보험을 제대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기술의 발전으로 고객센터나 설계사를 통하지 않아도 해당 보험사의 홈페이지나 앱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어 그만큼 지급 속도도 빨라졌다.
무엇보다 보험계약을 진행할 때 가입자의 과거 병력(보험금 청구)을 확인하는 방식도 쉬워졌다. 혹여 가입자가 병원 치료력을 잘 기억하지 못할 땐 전산을 통해 간단한 절차만으로 어떤 치료를 받고 청구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보험계약의 투명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보험사만이 아니라 가입자도 자신의 현재 조건에 맞는 제대로 된 보험을 선택할 수 있게 됐고 추후 보험금을 청구 할 때도 손해사정사를 통한 별도의 모집 경위 조사와 같은 번거로운 절차를 상당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의 뇌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뇌 사용 범위는 아주 작은 일부분임을 어느 뇌과학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뇌의 더 많은 부분을 사용하게 되면 인생이 좀 더 수월해질 것 같지만 정보의 과다를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모든 기억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에게 반드시 유용하지 않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기술적으로는 기록 방식이 점점 더 발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기억과 실제 기록 사이에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점이다. 간병인 보험 가입을 하려 했던 고객은 몇 년전 무릎 십자인대 파열 진단 코드를 받았던 것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았다.
꼭 보험 때문만이 아니다. 기억이 아니라 기록이 살아갈수록 여러 경제적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나의 행적이 기록된 자료의 주체는 나 자신이자 개인정보이기에 기록 전에 한 번 더 확인하고 기록 후에도 그 기록을 보관해야 나중에 행여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을 방지할 수 있다. 나의 증명은 대부분 기억이 아닌 기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서지은 필자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 말하고, 듣고, 씁니다. 장래희망은 최장기 근속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입니다.
마흔다섯에 에세이집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줄이야>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