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찬 심리상담사ㅣ심리상담사라는 직업 덕에 인간의 겉모습에 감추어진 속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내담자(심리상담적 도움을 받는 사람)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내면의 깊은 슬픔, 고통, 분노 등의 정서를 마주할 기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을 겪었을까’와 같은 충격을 받기도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의사인 주여정(이도현 분)이 문동은(송혜교 분)의 학교 폭력 피해 이야기를 듣고 학폭으로 문동은의 몸에 난 상처를 본 후처럼 말이다.
<더 글로리>(연출:안길호/극본:김은숙/출연:송혜교,이도현,임연진 등)는 잔인한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드라마의 완성도 측면에서 시청자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하지만 청소년 관람불가 드라마다. 그만큼 폭력의 묘사 수위가 높다.
심리상담은 상담실이라는 계획적으로 제한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 만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일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담자들의 슬픔, 고통, 분노 등 삶에서 느끼고 싶지 않은 정서에 전염되고 압도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시청자로서 드라마 <더 글로리>의 잔인한 학교 폭력 장면을 보면 학폭 가해자들의 인간성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심리상담사로서 아동·청소년기의 학폭 피해 경험이 한 사람의 나머지 인생 전체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상담을 통해 경험하기 때문이다.
학폭 피해자인 문동은은 학폭 가해자인 박연진(임지연 분)에게 “내 소원이 뭐였는 줄 아니... 나도 언젠가는 너의 이름을 잊고 너의 얼굴을 잊고... 제발 기억조차 못하게”라고 이야기한다. 학폭 피해자는 평생 지우기 힘든 몸과 마음의 상흔을 지닌다. 이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트라우마의 주된 증상은 현재의 삶에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이 재경험되는 ‘플래시백’ 현상이다.
<더 글로리>에서 가정 폭력 피해자인 강현남(임혜란 분)이 카메라로 문동은을 촬영할 때 카메라 플래시가 트리거(트라우마 재경험 촉발제)가 되어 문동은의 과거 학폭 장면으로 ‘플래시백’이 일어난다. 학폭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트리거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평범한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심지어 가정폭력 피해자인 강현남은 카메라로 인물 사진을 찍기도 힘들어 한다. 그래서 많은 학폭 피해자들은 대인관계를 피하고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간의 인성을 이야기할 때 악마와 천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통해 인간의 악마 같은 태도인 잔인성과 폭력성과 가학성을 보여준다. <더 글로리> 첫 회에서 문동은이 에덴빌라 옥상에서 악마의 나팔꽃과 천사의 나팔꽃 이야기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을 연상시킨다.
낙원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는 인간과 함께 천사뿐만 아니라 악마를 상징하는 뱀이 있었다. 이 장면 후에 학교 폭력 가해자들인 박연진(임연지 분), 전재준(박성훈 분), 이사라(김히어라 분), 최혜정(차주영 분), 손명오(김건우 분) 등의 악마적 행위를 보여준다. 어찌 보면 인간의 마음 밭에는 악마와 천사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것 같다. 어느 씨앗이 발화하여 더 크게 성장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인성에 대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이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 중산층 출신의 남자 대학생들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대학생들은 실험 첫날부터 마치 진짜 수감자와 교도관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교도관 역할을 한 사람들이 특별한 지시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학 행위 방법이 더욱 잔인하고 악랄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2주 계획이었던 실험은 1주일도 안 되어 중단되었다. 이 실험을 주도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책 ‘루시퍼 이펙트’를 통해 인간의 악마화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누구나 <더 글로리>의 학폭 가해자처럼 될 수 있다. 평범하고 선량한 모습으로 살고 있더라도 말이다.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우연히 유전적으로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 밭에 뿌려져 있던 악마의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악마가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폭력 가해자들의 폭력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인성인 서로에 대한 존중감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는 어느 순간 충분히 악마가 되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해칠 수 있으니 말이다.
ps. 심리상담사로서 현장에서 경험해보면, 한국 사회의 학교 폭력에 대한 안전 시스템은 <더 글로리>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낮은 수준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드라마를 보다 보면 두려워진다. 우리 현실에서 만연한 모습 같아서 말이다.
청소년관람불가 드라마인만큼 아동·청소년의 시청은 막는 것이 좋을 듯싶다. 학폭의 묘사를 모방할까 걱정돼서다. 그리고 학폭 피해 경험이 있는 성인이나 임산부, 노약자도 안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서적으로 절대 편한 느낌의 드라마가 아니다. 학폭 경험이 없더라도 문동은이 학교 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보다 보면 현실에서도 벌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섬뜩해질 것 같다. 실제로 아동·청소년 폭력은 아직도 뉴스에서 종종 나온다. 줄었다고는 하나 아직 사라지지 않은 탓이다.
■ 최옥찬 심리상담사는
‘그 사람 참 못 됐다’라는 평가와 비난보다는 ‘그 사람 참 안 됐다’라는 이해와 공감을 직업으로 하는 심리상담사입니다. 내 마음이 취약해서 스트레스를 너무 잘 받다보니 힐링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주 드라마와 영화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찾아서 소비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서 글쓰기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