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50년대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사실상 유일한 국가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사십대는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오롯이 겪은 세대이자 한국 사회의 정확히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인더미들 in the middle]은 인더뉴스가 한국 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은 사십대들의 삶과 일, 그리고 꿈꾸는 미래를 들어보는 인터뷰 입니다. 세대의 가교이자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십대들의 진솔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을 조율하고 해법을 찾는데 보탬이 되길 바랍니다.
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아직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고 있는 선배들이나 동료들, 후배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민운동을 하면서 의외로 정년퇴직을 하는 분들은 거의 못봤습니다. 인생의 이모작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1980년생인 김아현 플랜be카운티 대표는 흔히 말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입니다. 바깥에서는 대표님, 사장님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작 그렇게 부르는 내부 직원은 없습니다. 지난해 인터넷 쇼핑몰 창업을 한 이후 계속 1인 다역으로 회사를 꾸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한때 여의도 모 국회의원의 보좌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지역의 환경단체와 서울의 인권단체에서 사무처장 또는 간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전공은 시민운동이나 정치와는 다소 무관했습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화구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에 더 손이 갔던 미대생은 세상이 잘못된 부분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고민 끝에 대학 동기들은 관심이 없던 언론사 취직을 준비했습니다. 언론사를 준비하며 만났던 이들과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부모님은 장녀의 앞날이 적잖이 걱정되었지만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했습니다.
최근 김포 풍무동의 신축 상가건물 내 플랜be카운티 사무실에서 만난 김 대표는 자신의 이야기가 자칫 시민운동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염려를 표했습니다. 15년 가까이 헌신했던 시민운동 분야의 실무자에서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 내 이윤을 목표로 하는 사업체를 이끄는 '사장님'으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이 남아있는 동료들에겐 변절로 보이진 않을까? 염려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시민운동을 할 때는 이른바 자본에 관련된 이슈 때문에 많이 싸웠기에 자본 자체를 백안시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시민단체에서 나와 사업을 한다고 하니까 우선 부모님이 반겨주셨습니다. 사실 부모님께서 자영업을 하시던 터라 내심 반기시는 것도 같았습니다."
김 대표가 차린 플랜be카운티는 다양한 여성용 이너웨어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입니다. 이른바 플러스 사이즈를 선택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한 압박스타킹 등을 판매합니다. 2년 전 대학교 동기들이 차린 아동복 쇼핑몰에 합류하며 일을 배웠고 지난해 연말 브랜드를 만들어 독립했습니다. 창업 자금은 6000만원 정도 들었습니다.
시민운동을 하며 어떤 지점에서 힘이 들었는지 대놓고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김 대표 역시 조심스러워했습니다. 김 대표는 에둘러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나이를 먹고 경험치가 많아지면서 내 주변의 삶은 다 디테일로만 이뤄지고 있는데 정작 시민운동은 그런 부분에서 명분을 이유로 놓치고 가는 게 갈수록 눈에 보였습니다. 여기에 시민운동 출신 정치인들에게서 봤던 한계와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부분들에서 괴리감을 느끼긴 했습니다."
김 대표가 시민운동을 얌전히(?) 했던 것은 아닙니다. 발파로 파괴될 위험에 놓인 곳을 점거하고 장기농성을 했다는 이유로 재산이 가압류 될 뻔도 했습니다. MB정권 때는 유독 환경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들이 어려움을 겪었는데 김 대표 역시 환경운동단체의 실무자로서 고초를 적잖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분명 보람도 있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 실제로 공익을 위해 무언가를 바꾸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건강을 돌보는 데 소흘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 생활과 실물 경제와 유리되고 있는 스스로를 감지해야 했습니다.
시민운동 단체를 나올 때, 그 분야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쉬움, 혹은 "너 마저?" 라는 안타까움과 일종의 배신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적잖았습니다.
"저로서는 애증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한데, 시민운동을 하면서 힘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한편으로는 마흔 넘어 이제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커지면서 몇 번의 반려에도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운동판을 떠났던 사람이 장사를 시작한다고 했더니 대놓고 욕하는 선배도 있었습니다."
김 대표가 사업, 본인의 말로는 장사에 뛰어들면서 가장 반성한 부분은 '구체성'입니다. 물건의 시장조사에서부터 발주하고 주문을 받고 배송을 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언어와 글은 추상적인 것들이 없었습니다. 매사 구체적인 내용이 소통의 기본이었습니다. 그간 자신의 말과 글이 얼마나 추상적이었나 반성이 됐습니다.
"쇼핑몰을 하다보니 같은 동종 업계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분들 대부분 저보다 어린 나이지만 마치 설명서를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디테일하더라구요. 가령 원단을 보고 이 원단의 소재는 무엇과 무엇이 몇 퍼센트 비율로 섞여 있고, 방염 정도가 어떻고 단가는 얼마고 어느 공장이 잘 만들고 등등이요."
아동복 인터넷 쇼핑몰에서 일을 익힌 김 대표는 본인의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칙이 있었습니다. 다수보다는 소수가 필요로 하는 제품일 것, 품질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제품일 것. 초기 자본이 많이 들지 않을 것. 고심 끝에 택한 것이 바로 플러스 사이즈 여성의 이너웨어 중 기능성 의류였습니다. 몸은 편하게 해주는 기능성 의류. 이에 대한 필요는 김 대표가 누구보다 절실하기 알고 있었습니다. 신장 기능 약화로 자주 몸이 부었기 때문입니다.
"마케팅이나 홍보비용을 낼 여유가 없다보니 아직 매출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돈을 벌자고 시작한 것도 있지만 내 불편을 해소하고,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자고 마음 먹은 덕에 제품 개발비도 적잖이 들었거든요. 다행히 구매 후기를 보면 시중에 나온 플러스 사이즈 제품들보다 훨씬 편하고 저렴한 편이란 말씀이 많아서 힘을 내고 있습니다. 좋은 제품 합리적인 가격에 파는 것. 그게 또 어쩌면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란 생각도 들구요."
청춘의 시절, 김 대표는 통장의 예금잔고를 고민하기보다 환경과 인권을 축으로 한 여러 사회 문제를 고민하고 또 변화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소기의 성과도 있었고 또 소모되는 경험도 겪었습니다. 마흔 초반에 인생의 항로를 틀면서 혼란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운동'의 영역이 필요하고 그 '운동' 덕에 공공의 영역들이 자본의 탐욕 앞에서 근근히라도 버티고 있단 생각에서입니다. 그 혼란은 사실 지금도 계속 마음 한구석에서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장사를 하다보니 자본을 모으는 과정과 그 방식과 또 그 출처에 대한 고민도 커지고 있습니다. 자본은 그 자체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자본이 만들어내는 여러 부조리함들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요즘 비슷한 규모로 장사하는 분들 만나서 이야가를 하다보면 돈을 많이 벌어서 본인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사람들이 또 절대 다수는 아닙니다.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유기동물을 위한 시설을 짓고 어려운 분들 돕고 싶다고 하면, 비슷한 꿈을 가진 분들도 꽤 많았거든요."
김 대표가 비영리기관을 기반으로 한 시민운동을 떠나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사업체를 운영하면서 겪은 내면의 혼란은 한국 사회의 중간 지점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40대들이 공감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공동체의 공익과 개인으로서의 행복 그 중간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에 대한 물음과 연결되어서입니다.
"세상에 대한 애정과 선의, 그 마음을 지켜가면서도 장사는 영리하게 잘하는 모델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돈도 잘 벌고 또 그 돈을 세상의 공익을 위해서 선뜻 내놓는 멋진 할머니가 되는게 꿈이에요. 예전에는 그런 모델이 되고 싶다는 것을 말하면 다소 부끄럽고 남사스럽기도 했는데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꿈이 있다고 주변에 많이 말하고 떠들고 다녀야 나중에 돈을 벌더라도 그에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래서 첫 번째 목표는 제주도에 보란 듯이 유기동물 보호센터를 짓는 것이에요. 그게 아마도 플랜C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