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지은 보험설계사·칼럼니스트ㅣ매월 마지막 날이면 보험회사 사무실은 볶은 콩이 다다닥 튀듯 분주하다. 두 달 이상 납부하지 않으면 보험 효력 상실이 발생할 수 있으니 이를 방어하기 위해 가입자의 보험료 입금도 살펴야 하고, 다음 달 급여를 위해 당월 영업 실적도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여타 일반 사무직 근로자와 달리 보험설계사의 위치는 프리랜서라 회사와 금융당국이 정한 규칙은 있어도 하지 않으면 회사로부터 제재를 받는 기본 업무는 거의 없다. 근태를 비롯한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자기 주도적’ 세계가 바로 보험회사다.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업무공간이 되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업무 파트너가 된다. 좋게 바라보면 시간을 내 방식대로 활용할 수 있으니 합리적이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과 만나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가 커진다.
반면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어 내가 나를 엄격하게 붙들지 않으면 자칫 나태의 늪에 빠질 수 있고, 다소 힘든 사람과도 원만하게 지내려다 보니 이해와 오해 사이에서 방황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진입장벽이 낮고 나가기 수월한 곳이지만, 한 곳에서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는 보험설계사가 드문 까닭도 그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내 경쟁상대도 나고, 내가 극복해야 할 존재도 나 자신이다. 매일 같이 나와 싸우는 일은 새롭게 고독하고 어렵다. 어느덧 10년 차 경력을 앞둔 보험설계사지만 고민의 내용은 초심자 시절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고민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에 나름의 맷집이 쌓였다. 마치 매일의 단련을 통해 몸의 근력을 키우듯.
지난한 나와의 싸움에 지치는 순간도 있지만 그런 나를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일들이 선물처럼 다가오는 날이 있다. 그때 권해주신 보험에 가입한 덕분에 인생의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인사를 받는 때다. 7월 마지막 날, 한 달의 마무리를 완료하고 다소 지친 모습으로 퇴근하던 중 카톡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설계사님? 무더운 날씨에 잘 지내시는지요?
최근 제가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때 권해주셔서 가입한 암보험에서 진단비를 받았습니다.
다들 소액암(각주: 일반암보다 진단비가 적게 지급되는 종류의 암) 이라 그래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큰 금액이 나왔어요, 그 보험이 이렇게 유용할 줄 몰랐습니다.저는 당분간 보험 가입이 어렵겠지만 딸과 남편에게 좋은 상품 추천해 주시길 부탁드려요.
정말 고맙습니다!
한 달의 피로가 한 방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그분 상태가 심각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조기 발견으로 수술 잘 받고 회복에 전념하고 있다고 해 안심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그분은 당시 보험 가입을 망설였고 나는 가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향의 설계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입 후 고민하는 방법도 있다며 평소의 나와 달리 포기하지 않고 권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내게 미래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을 리는 없다. 그저, 설계사인 내게도 그 보험의 보장 내용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와 내가 먼저 가입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권할 수 있었다.
보험설계사 경력이 늘어갈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게 사람 사이의 이해와 오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느끼는 상대와의 거리와 상대가 느끼는 나와의 거리에 차이가 있어 이해가 당연할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지 않은 오해에 당황한 나머지 버벅대거나, 반대로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다가갔는데 상대가 오히려 친밀하게 다가와 마음의 평화를 찾은 날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계약을 좇는 설계사는 쉽게 지치고 사람을 구하는 설계사는 하루가 다르게 단단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고객과 보험 체결을 할 때마다 항상 같은 내용의 기도를 마음속으로 한다.
부디 이 보험 써먹을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보험설계사가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설계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또 누군가는 계속 이 길을 가도 되는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맛에 보험설계사를 그만둘 수 없다. 이해와 오해의 소용돌이에서 쓰러지지 않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도 마음 근력을 키워본다.
■서지은 필자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 말하고, 듣고, 씁니다. 장래희망은 최장기 근속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입니다.
마흔다섯에 에세이집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줄이야>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