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들의 아빠 이원묵] ‘최소한의 체면치레용.’
내가 보험을 정의하던 표현이었다.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지인들의 거듭된 부탁에 마지못해 들어야 했던 달갑지 않은 손님이기 때문이었다. 딸 셋을 건사해야하는 딸부잣집 아버지가 되기 전까지만해도 말이다.
점심식사 후 사무실을 오르는 계단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거듭된 술자리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때. 직장생활을 하는 중년 남자들이라면 불현 듯 건강에 대한 불안감이 밀려오면서 가족을 돌아본 경험이 있을 거다.
나도 그랬다. 그래도 쌍둥이를 놓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가는 잠시잠깐의 불안이었을 뿐 내 건강을 이유로 가족을 위한 뭔가 특별한 안전장치를 해두어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 쌍둥이를 출산, 세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고나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게 많은 지인들이 “인생은 길고 혹여 모를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거다”라고 강조할 때는 콧방귀도 뀌지 않던 내가 인터넷으로 사망보험(생명보험)을 검색하게 될 줄이야.
새로 태어난 이쁜 공주들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보며 불행함을 염두에 두는 것이 너무 앞선 걱정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 아이와 아내를 건사해야 하는 가장이 되어 버린 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만에 하나 잘못될 경우 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온전히 아내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은 이제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경력이 단절된 중년의 여자가 세 아이를 감당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사실이니까.
이런 엄청난 리스크를 냉정하게 바라볼 때 비로소, 대안으로서 다가온 것이 생명보험이다. 최소한 지금의 나에게 보험이란 아내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세 아이를 위해 아빠가 준비해 둘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라고 말해 두고 싶다.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선물’이니만큼 내 딸과 아내들은 받지 않기를…. 길디길게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주고 받아야 할 큰 선물들이 너무도 많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