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자리 대표 김영우] 예전에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하는 후배에게 “보험들었냐?”라며 개걸스러운 농을 던지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후배에게 건넨 ‘보험’의 의미는 ‘능력 없는 네가 여자 친구의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임신’이라는 보장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저잣거리에서나 들을 법한 그런저런 ‘보험’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경제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여기저기 아는 인맥이면 한사람 건너 한사람씩 보험에 종사하는 사람들(친척, 친구, 동창, 교회, 엄마의 친구, 친구의 친구, 결혼해서는 처가에 꼭 한 두 명씩은 포진돼 있는 보험마피아(?) 때문에 얼굴을 붉히거나 사람관계가 서먹해져 본 경험이 있는 분들 많으시리라)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나는 ‘보험’이라면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편이었다.
또, 계약을 위해서는 간·쓸개 다 빼줄듯 밤이고 낯이고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전화, 계약하고 나면 주변 지인 소개를 부탁하고 나중엔 연락마저 뜸해지다 뭐라도 물어보려고 전화를 하면, ‘지금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라는 친절한 여비서의 안내멘트에 울화통을 터트린 기억들. 이래저래 내게 보험이란 분명 대단히 불편한 경험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 죽고 나서 몇 억 있으면 뭐하나? 나 죽으면 누구 좋으라고?’만 생각했던 혈기서슬 퍼렇던 내가 변하기 시작한건 결혼을 하고 두 딸이 생기면서였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비교적 늦은 나이(39세, 아내 나이 35세)에 결혼을 하고, 노산을 내게 보험이라는 ‘불편한 인식’을 넘어야 하는 과제가 생겼다.
주변에 우리에게 알맞은 보험이 무엇인가를 꼼꼼히 물어보고 꼭 필요한 보험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큰 아이가 대학에 들어갈 나이면 내 나이 60, 서른에 시집간다고 하면 내 나이 70’ 무언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
그리고 아이들이 크면서 크고 작은 질병에 걸릴 때를 대비한 보험 정도는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실비보험과 내 앞으로 암보험을 가입했다. 하지만 보험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내게 보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에피소드 1.
두 아이가 여섯 살 네 살이 되던 어느 주말, 집을 나서 약속장소로 향하던 내게 아내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나인이 손가락이 깊게 배었어요.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되돌아 올 수 있어요?” 급하게 집으로 차를 돌렸다. 아이의 손을 살펴보니 줄자에 손가락이 거칠게 베어 뼈까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급히 아이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꿰매고 치료를 받았다. 한숨 돌리고 나니 턱없이 비싼 주말 응급의료비가 찍힌 영수증이 건네진다. 병원비 계산을 하고 ‘그나마 다행이다’하고 집으로 귀가하는 차 안에서 아내가 내게 “오빠 혹시 진료비를 실비보험에서 보상해 주지 않을까? 00씨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안 될까?”
전화를 하니 역시나 여비서의 상냥한 보이콧 멘트. 결국 월요일 아내가 직접 보험회사에 직접 전화해 상담을 받아보니 치료비 중 실비의 70%가 보상이 된다는 답을 받았다. 문제는 그 70%를 받기 위해 치료받은 병원에 가서 진료영수증 및 몇 가지 서류를 받아야하는 번거로움과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확인절차.
“에잇~ 이거 몇 만원 받으려고 이 짓을 해야 돼? 이 XX는 왜 전화도 안 받아?” 가입시킬 때는 갖은 말로 현혹하더니, 정작 보상을 받으려니 증명서니 본인 확인이니 절차가 마치 ‘나를 귀찮게 해서 그 까짓 보상 안 받게 하려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보험금 지급을 위한 절차가 주는 피로감은 불쾌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에피소드 2.
37년 생 아버지는 왜 이렇게 필요 없는 보험을 들었을까? 2010년 11월부터 아버지가 내시던 보험료를 내가 부담하고 있다. 가입특약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꼬박꼬박 보험료 납입을 하고 있던 올해 어느 날, 예전 아버지께 이 보험을 권유했던 사람이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효 보험은 만기가 되어서 축하금 받으셨지요?”
“네~ 받아서 어머니 드렸습니다.”
“네~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암보험 두 개 있죠? 그것도 계속 납입하고 계세요?”
“네.”
“근데요 고객님~ 그 보험은 아버님이 80세까지 돌아가시지 않으면 자동으로 보험계약이 사라지는 거 알고 계세요?”
“네? 그런 보험도 있나요? 아니 그런 보험을 왜 들었답니까?, 그리고 그걸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다가 이제야 전화하는 이유가 뭡니까? 사람 약 올리는 거요?”
세상에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었다. 가입특약서를 찬찬히 살펴 보니 절대로 그럴 일이 없는 내 아버지가 80세 이전에 돌아가셔야지만 보상금이 나오는 보험이었다.
‘이 보험을 십 수 년 동안 납입하도록 가입시켜 놓고 이제 와서 다른 보험으로 갈아타라고? 뭐 이따위 사람이 다 있나? 영업 수당욕심에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다른 보험으로 갈아타라고 전화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불쾌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나야 그 사람을 잘 모르지만 아버지는 분명 누군가의 소개로 가입을 했을 테고 그렇다면, 최소한 인간적 도리 때문에라도 몇 번의 관리, 안부전화 정도는 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말이다.
아무리 좋은 상품이라도 그것을 파는 사람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 상품은 악마의 유혹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내일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혹은 자신을 위해 보험에 가입을 한다. 따라서 보험에 가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생명을 가족에게 양도하는 의미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소중한 삶을 다루는 보험사와 보험을 판매하는 설계사들께 이 한마디 꼭 드리고 싶다.
삶과 죽음의 경계. 당신의 일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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