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소설가ㅣ처음은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 첫인상이 어지간해선 바뀌지 않고, 첫사랑이 쉽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듯이. 첫 술이 남기는 기억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다.
술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 중에서 가장 이상한 음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게 본능인데, 술은 그 본능에 정면으로 반하는 음식이다. 달다가도 쓰고, 때로는 비릿해서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맛으로만 따지면 진입장벽이 꽤 높다. 그런데 그 진입장벽을 넘어서는 순간, 지금까지 몰랐던 신세계가 펼쳐진다. 나빴던 기분이 좋아지고, 맛있는 음식이 더 맛있어지는 신세계. 진입장벽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바깥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이유일 테다.
치킨과 만난 맥주, 천하제일의 맛을 내다
내가 자의로 처음 술을 마신 기억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가친척이 모여 천렵을 했던 그날, 나는 호기심에 몰래 병맥주를 하나를 빼돌려 그늘에 숨어 마셨다. 미지근하면서도 씁쓸한 탄산의 맛. 맥주가 내게 남긴 첫인상은 별로였다. 그날 이후 내게 맥주는 오랫동안 맛없는 술이었다. 가까운 편의점에만 가도 냉장고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맥주가 즐비한 요즘과 달리, 국내 대형 주류회사 몇 곳이 생산하는 라거 외에는 선택권이 없던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다. 한동안 내게 맥주란 모임에서 그저 시원한 맛으로 마시는 달지 않은 음료수였을 뿐이다.
그런 맥주일지라도 천하제일의 맛을 내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갓 튀겨낸 치킨과 함께할 때였다. 입안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며 혀에 기름칠하는 튀김옷, 적당히 염지 된 살의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 여기에 씁쓸하면서도 청량한 맥주의 탄산이 어우러지면? 어우야! 맥주와 기름진 안주의 궁합은 건강상 좋지 않다지만 어쩔 텐가? 당장 입에서 맛있다고 아우성치는데. 좋은 안주는 술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고, 술도 맛있게 하는 마법을 보여준다.
고시원 생활 각성시킨 생맥주 한 잔에 치킨안주
기왕 치킨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썰을 풀어보겠다. 나는 갓 튀겨낸 치킨 냄새만큼 인간의 침샘을 자극하는 향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다. 출출할 때 맥주와 함께 먹는 치킨 서너 조각은 그야말로 천하제일 진미다. 문득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대학교 재학 시절이 떠오른다.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가을, 나는 그때 살고 있던 고시원과 가까운 둘둘치킨 체인점 앞에서 서러워 눈물을 흘린 일이 있다. 매장 유리창 안에 층층이 쌓여있는 수많은 치킨, 환풍기를 통해 바깥으로 맹렬하게 쏟아져 나오는 고소한 치킨 냄새. 저 치킨을 맥주 500cc를 곁들여 딱 몇 조각만 먹고 싶었는데, 내 지갑에는 그럴 돈이 없었다.
매장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침만 꼴딱꼴딱 삼키던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좁은 고시원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시원 주방에서 밥솥 바닥에 말라붙은 밥을 긁어먹으며 앞으로 최소한 치킨과 맥주 정도는 먹고 싶을 때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고 싶다고 결심했었다. 그 정도로 치킨 냄새의 자극은 대단했다.
고향의 맛 대신 브랜드로 각인된 치킨의 맛
치킨은 집에서 조리하기 어려운 음식이다 보니 바깥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치킨은 고향의 맛 대신 브랜드로 각자의 혀에 각인된다. 저마다 꽂힌 치킨 브랜드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가 꽂힌 치킨은 KFC 오리지널과 리빠똥 치킨이다.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후자를 조금 더 좋아한다.
우선 KFC 오리지널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다. KFC 오리지널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맛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치킨이다. 짭짤하면서도 무엇이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폭발적인 감칠맛. KFC는 국내 치킨 브랜드와 달리 압력솥에 기름과 닭고기를 넣고 고온 고압으로 튀겨낸다. 이 때문에 튀김옷의 식감이 부드럽고 육질이 촉촉한데, 여기서 꽤 호불호가 갈린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치킨 하면 역시 바삭한 식감 아닌가.
그런 이유로 대한민국은 KFC 매장이 존재하는 국가 중에서 오리지널보다 크리스피가 더 잘 팔리는 독특한 국가다. 국내 치킨 체인점 중에서 동키치킨이 KFC 오리지널과 비슷한 맛을 내면서도 바삭한 식감을 자랑하는데, 매장이 드물어 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KFC 오리지널의 감칠맛이 끌리는데 식감이 아쉽다면, 리빠똥 치킨으로 눈을 돌려보자. 상왕십리역 리빠똥 본점은 나와 동갑(1981년)인 노포로 ‘과일치킨’이 주력 메뉴다. 한때 체인점도 꽤 거느렸었는데, 이젠 서울 성동구의 상왕십리역 본점 외에 몇몇 지점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리빠똥 치킨은 튀김옷이 얇은 옛날 통닭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치킨과 함께 나오는 사라다(샐러드와 사라다는 다르다!)에서 관록이 느껴진다.
행복이란, 내가 좋아하는 치킨에 맥주 한 잔
언뜻 보면 살짝 탄 시골 통닭처럼 보이지만, 담백한 시골 통닭과는 뿌리부터 다른 맛이다. 씹는 순간 폭발하는 향신료의 복합적인 향기와 짭짤한 맛, 바삭한 식감이 미각과 후각을 한껏 자극해 맥주를 무제한으로 부른다. 바삭한 껍질에서 풍기는 은은한 카레향이 더욱 식욕을 자극한다. 정말 맛있는 치킨이다. 한때 상왕십리역 근처 고시원에서 살았던 나는 어쩌다 돈이 생기면 리빠똥에서 치킨 반 마리를 튀겨 좁은 방에서 홀로 맥주와 홀짝이곤 했다. 즐거울 일 하나 없던 시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입이라도 행복했다.
지난여름, 서울 명동 프린스호텔이 내게 객실 하나를 5주간 집필실로 내줬다. 덕분에 나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호텔방에서 소설을 집필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 호사 속에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맛은 주머니가 가볍던 시절에 맥주와 함께했던 리빠똥 치킨이었다. 매장이 많지 않은 데다, 내가 사는 김포와도 거리가 멀어 몇 년 동안 맛을 보지 못한 터였다.
나는 맛있게 치킨을 먹을 방법을 구상했다. 땀을 많이 흘려야 맥주가 더 시원하게 넘어가고, 적당히 배가 고파야 치킨을 맞이하는 설렘이 커진다. 나는 프린스호텔에서 청계천을 거쳐 리빠똥 본점으로 이어지는 6km가량의 동선을 짰다. 철 지난 붉은색 소파, 오래된 티를 대놓고 내는 나무 테이블. 따가운 오후 햇살을 두 시간 가까이 뚫고 걸어서 도착한 리빠똥 본점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얼린 물수건으로 땀을 닦고 생맥주 몇 모금을 마시며 치킨 반 마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컵라면이 불기를 기다리는 시간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기다린 끝의 맛은? 말해 뭐 하나! 그때 그 시절의 맛 그대로였다. 집필실로 다시 걸어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행복이 별건가. 자기만의 치킨에 곁들이는 맥주 한 잔이면 이렇게 끝내주는데.
■정진영 필자
소설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장편소설 '도화촌기행'으로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침묵주의보', '젠가', '다시, 밸런타인데이',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썼다. '침묵주의보'는 JTBC 드라마 '허쉬'로 만들어졌으며, '젠가'도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앨범 '오래된 소품'을 냈다.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공저)이 있다. 백호임제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