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문승현 기자ㅣ올해초 윤석열 대통령의 '은행은 공공재' 발언이 나온 직후 금융당국은 '은행권 경영·영업관행·제도개선 TF(이하 제도개선 TF)'를 출범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융권에서 회자된 단어가 바로 '메기'였습니다. 금융당국이 TF 제1검토과제로 '신규 플레이어 진입'을 꺼내들었던 탓입니다.
이는 카카오뱅크·케이뱅크·토스뱅크 등 이른바 인터넷전문은행과 유사한 형태의 새로운 선수(메기)를 투입해 기존 시중은행 중심으로 돌아가는 금융권역에 긴장과 경쟁을 촉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됐습니다.
하지만 이달말 금융당국이 개선안 발표를 앞둔 가운데 금융권 안팎에서는 제도개선 TF가 과연 제대로 된 개선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논리보다 대통령실의 정치논리가 적용될 가능성이 큰 정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의 나비효과
우선 금융권역에 긴장과 경쟁을 촉발하겠다는 TF는 은행업 인가단위를 세분화해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 등에 특화한 소규모 전문은행을 거론했습니다. 대표사례로는 미국 서부 스타트업의 돈줄 역할을 해온 SVB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재도개선 TF 논의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3월 SVB 파산 소식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강타하면서 신규 플레이어(메기) 진입론은 동력을 잃었습니다.
금융당국이 강행한다 해도 새로운 은행을 설립할 만한 자본력과 의지를 갖춘 경제주체가 등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금융당국 한 인사는 "누군가 은행을 해보겠다고 나설 기업이 있을지도 사실 모른다"며 "특정업계에 특혜를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난색을 표한 바 있습니다. 김 위원장은 최근 취재진과 만나 "새로운 은행을 출범시킨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수년은 걸리는 일이고 생각해봐야 할 이슈가 여럿 있다"며 "은행 신규진입에 대해선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카드사-증권사-보험사-은행의 동상이몽
제도개선 TF가 발족하면서 금융권의 대표적인 규제제도인 지급결제권을 놓고 금융업권간 동상이몽도 한창입니다.
카드사를 회원으로 둔 여신금융협회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을 통해 카드사에 종합지급결제 업무를 허용하면 소비자가 카드사 지급결제 플랫폼에서 다양한 디지털 금융·소비·생활편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후생증가 효과가 기대된다"며 카드사의 종합지급결제 허용을 촉구하고 나섰습니다.
증권사·자산운용사 등이 정회원으로 활동하는 금융투자협회는 자본시장법상 증권사의 자금이체 대상이 '투자자예탁금'으로 명시돼 있다는 점에서 '결제불이행' 위험은 없다면서 증권사의 법인 대상 지급결제 허용을 들고 나왔습니다.
보험업계를 대변하는 보험연구원은 보험업 지급결제 겸영을 허용해 은행과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며 일일 순채무한도(지급예정액-수신예정금액) 대행은행 예치 등 결제리스크 해소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정작 한국은행은 지급결제제도 유연화를 통한 경쟁을 촉발하려는 제도개선 TF와 달리 불가 입장을 밝혔습니다. 지난 3월말 열린 TF 회의에서 한은 측 관계자는 "전세계에서 엄격한 결제리스크 관리가 담보되지 않은 채 비은행권에 소액결제시스템 참가를 전면 허용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비은행권 소액결제시스템 참가 확대시 고객이 체감하는 지급서비스 편의 증진 효과는 미미한 반면 지급결제시스템 안전성은 은행의 대행결제 금액 급증, 디지털 런(digital run) 발생 위험 증대 등에 따라 큰 폭 저하될 것으로 우려된다"며 부정적 인식을 보였습니다.
은행권은 지급결제권 유연화에 맞서 금융당국의 비이자수익 비중 확대 요구에 발맞춰 투자일임업 전면허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투자일임업은 투자자로부터 금융투자상품 투자 판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일임받아 대신 운용하는 서비스로 은행은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로 제한돼 있습니다.
은행권은 소액투자자·은퇴자·고령자 등에게도 은행의 광범위한 영업망을 통해 양질의 자산관리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금융투자협회는 중소 증권사 경영난 가중, 증권업계의 다양성 훼손 등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투자일임업 허용은 오래된 이슈 중 하나여서 다른 업계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며 "만일 은행 밖으로 지급결제의 문이 열리고 은행에는 투자일임이 허용된다면 은행권으로선 너무나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윤심' 읽어야 하는 금융위원장
"결국 장관님이 용산에 한번 갔다오셔야 할 거예요…"
최근 제도개선 TF 진행상황과 관련,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다른 금융당국 고위인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것이 있지만 VIP와 생각이 다를 수 있지 않겠느냐"며 "(의중을) 한번 더 확인해볼 필요도 있다"고 했습니다.
김주현 위원장이 제도개선 TF에서 보따리 풀듯 펼쳐놓은 다양한 사안을 추려낸 뒤 그 리스트를 들고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에 들어가 대통령으로부터 컨펌(confirm)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 고위인사는 "모든 금융업권이 이참에 수많은 민원을 쏟아내고 있다"며 "당초 계획한 TF 일정이 조만간 마무리되면 내부적으로 개선안 리스트를 정리한 뒤 적정한 시점에 적정한 형식을 통해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난 7일 기준, 11차까지 회의가 열린 제도개선 TF에서 다뤄진 문제 대부분은 그간 이해관계가 다른 금융업권 오랜 민원입니다. 정부가 그동안 이를 알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경제운용의 최후 보루인 '금융안정'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논리에 입각한 진중한 정책적 판단이라는 원칙이 TF가 내놓은 개선방안의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재도개선 TF 활동 결과가 '이자장사'라는 자극적 슬로건으로 은행권에 무리한 변화를 강제하거나 업계별 희망사항을 조건부 수용하는 주고받기식 성과 만들기로 귀결 된다면 가뜩이나 침체 경고등이 켜진 한국 경제 회복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으로부터 시작된 이슈를 유야무야 할 순 없다. 우리가 흐지부지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제도개선 TF와 관련, 말을 아끼던 금융당국 관계자가 어렵게 꺼낸 이 발언이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로 제도개선 TF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으로 수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