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회사원 김시재] 아직 최종 합격의 흥분이 가라 앉지도 않은 취업 발표 다음 날, 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솔’ 음에 정확히 맞춘 하이톤의 여성이 나에게 반갑게 말을 걸어 왔던 것.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는 000보험의 000입니다. 이렇게 전화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블라 블라 블라 블라.”
지금 같으면 “네. 괜찮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회의 중이라서요, 통화가 힘듭니다.”하고 정중히 거절했을 전화였지만, 취업 성공 후 부푼 가슴을 안고 미래에 대한 계획(사실 계획이라기 보다 앞으로 내 통장에 로그인 할 월급을 어떻게 로그아웃 실킬까에 대한 막연한 공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듯하다.)을 세우고 있던 나는 텔레마케팅 상담원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고객님. 혹시 회사원이신가요?”
“네. 이번에 합격했습니다.^0^” 자랑스러운 나의 대답.
“너무너무 축하 드립니다. 고갱님~ 이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셔야 할 때 인건 아시죠? 취업까지 하셨으니 보험은 필수라는 말 많이 들으셨죠? 이번에 새로 나온 상품은 법이 바뀌기 전 마지막 찬스로… 블라 블라.”
상당원과 대화 중에 생각했다. ‘그래. 어른들도 기본적으로 종신보험이랑 실비보험은 있어야 된다고 그랬어. 어차피 가입할 거 법 바뀌기 전 혜택이 있을 때 가입하는 게 좋겠지? 아~ 역시 난 가치 소비쟁이야.’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나는 너무도 쿨하게 종신보험에 가입했다.
등기로 계약서와 약관 등 각종 서류를 받았을 때에도 나는 그냥 서랍 한 구석에 고이 모셔 두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어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니 보험들어야제? 친한 친척이 보험한께 그거 들어라. 보험도 들 겸 집에 한 번 온나.”
어머니의 기도 살려드릴 겸 나는 또 쿨하게 보험에 가입했다.
그것이 무슨 보험인지도 모른 채, 친한 친척이니까 믿고 대충 알아서 해 주시라는 당부와 함께 난 멋지게 계약서에 사인을 휘갈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왜 그렇게 경제관념이 없고 계획성이 없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가치소비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과 멋지게 취업에 성공해서 어머니의 기까지 살려 드렸다는 뿌듯함이 내 이성을 마비 시켰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보험료는 자동이체로 빠져 나가고 있었고, 텔레비전에서 암이나 각종 질병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 마다 속으로 든든함을 느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취업 후 4년이 되었을 때, 친한 친구가 보험을 한다며 컨설팅을 해주겠다고 했다.
워낙 친한 친구라 보험 하나 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그 녀석의 친절에 보답하는 의미로 보험 계약서를 내밀면서 컨설팅을 부탁했다.
한참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던 내 친구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나를 한 번, 계약서를 한 번, 또 나를 한 번, 계약서를 한 번…몇 번을 그렇게 보더니 물었다.
“왜 종신보험이 두 개나 되냐? 그리고 너 상황이랑 너무 안 맞는데?”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한참을 친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내가 전화로 가입한 보험과 친한 친척분께 가입한 보험이 회사가 다른 종신 보험인 것을 알았으며, 세세한 보장을 뜯어 봐도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보장들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친구의 컨설팅을 자세하게 듣고, 나는 기존의 보험을 모두 해지했다. 원금 손실을 감수한 채, 눈물을 흘리며, 비싼 수업료를 냈다고, 더 늦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그렇게 나는 사회 초년생의 호기로 가입한 보험을 모두 해지했다.
그리고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진짜 내 보험을 가입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보장 내용이 가물 가물 하지만, 어쨌든 가입 당시 나는 많은 고민을 했고, 진짜 내 보험을 가입한 것이다.
그렇게 내 보험 1막은 새드앤딩으로 막을 내렸고 친구와 함께 2막을 시작했다. 혹시라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밝히는 것은, 이 글이 절대 텔레마케팅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보험업을 하시는 많은 분들의 기분을 언짢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이 그냥 막 보험에 가입한 그 당시 나의 어리석음을 만 천하에 고백하고 가슴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버리려는 것이다. 참 바보 같았던 그때, 보험을 통해 나는 하나의 깨닳음을 얻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그게 그거지. 대충 아는 사람한테 맡기고 말지. 하는 순간 나는 바보가 된다고…. 마지막으로 어느 한 바보가 취업에 성공한 많은 사회 초년생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사인은 막 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