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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아트] 수화 김환기가 그리워한 고향의 ‘한 점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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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8, 2023, 11:06:08

호암미술관, '한 점 하늘 김환기'전 개최
전면점화 등 김환기 작품세계 아우르는 120점 전시
신안 안좌도 김환기 고택에서 떠올린 전면점화

(신안)=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가격은 물건의 가치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입니다. 미술품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화 김환기(1913~1974)의 그림은 한국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작가의 근현대 미술품 경매가 최고액 TOP 10 가운데 김환기의 작품이 9점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환기의 전시가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배경 중에 하나입니다.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인 '한 점 하늘 김환기'전이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지난 5월 18일 시작됐습니다. 호암미술관 재단장(리노베이션)을 마치고 처음 마련한 김환기 회고전은 오는 9월 10일까지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열린 김환기의 전시 중에 가장 규모가 큽니다.

 

2019년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약 132억원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세운 일명 '우주'(Universe 5-IV-71 #200) 외에도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가져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 등의 대표작을 비롯해 미공개작 등 유화 88점(점화 15점), 1950년대 스케치북, 드로잉 등 약 120점을 선보입니다. 이 외에도 김환기의 작품 구상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스크랩북과 김환기가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청년 시절 사진 등도 처음으로 선을 보입니다.  

전시를 기획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그동안 김환기 전시는 점화로 쏠리거나 구상이나 추상으로 나눠 소개되는 등 전체적인 그의 예술세계를 조망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이번 전시는 점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살피며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로, 김환기 연구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시이기도 하다"고 밝혔습니다.

 

일반 공개에 앞서 프레스 설명회가 있던 날. 작품에 대한 설명 보다 그 말이 뇌리에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김환기의 시작은 과연 어디일까?

 

김환기의 실제 작품은 미술 취재를 하면서 종종 봤습니다. 김환기를 빼놓고는 한국의 추상미술을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20세기 들어 추상화가 회화의 전면에 나서는 전환기 때, 김환기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나아가 한국 추상화의 기틀과 길을 연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대상이 아닌 머릿속 관념을 그릴 수 있다는 추상화의 관점은 회화사에 혁명과도 같은 전위적인 흐름이었습니다. 그 전위를 한국에서 이끌었던 이가 바로 김환기였고 이 지점이 김환기가 타계 이후 계속 평가가 높아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김환기의 초기 작품들은 토착적인 메시지가 강했습니다. 한국의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화폭에 옮긴 게 다수였던 덕분입니다.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의 1부에서는 이러한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김환기의 삶의 궤적은 식민지 조선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세계사의 변방에 있던 한반도에서 태어난 작가 중에서는 매우 크고 넓었습니다.

 

김환기는 1913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당시 가좌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냈고 경성이었던 서울로 중학교 시절 잠깐 유학을 왔다가 당시 목포에서 경성보다 가기가 편했던 일본으로 밀항, 그곳에서 대학을 다녔고 예술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본가가 있는 안좌도를 본거지 삼아 경성과 일본을 오가며 식민지 시대를 버텼습니다.

 

한국 전쟁을 겪고 예술의 본고장으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에 가서도 작품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열린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석을 했다가 귀국길에 들린 미국 뉴욕에서 명문대 미대 학장 같은 ‘계급장’을 떼고 작가로서 인생의 후반부를 보냈고 끝내 ‘전면점화’ 자신만의 추상양식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에 개인사적으로도 굴곡이 많았습니다. 천석지기 아버지를 둔 외동아들이었기에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일찍 결혼했습니다. 약관 스무살에 첫 딸을 낳았고 집안의 농사를 돕던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었고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그 시절 모두가 그렇듯 궁핍했습니다. 고향언덕이라는 뜻의 ‘향안’이란 호는 자신과 재혼을 위해 성과 이름을 바꾼 두 번째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훗날 아내는 남편의 작품이 보다 보편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애를 쓰고 남편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남편의 작업들을 정리했고 예술가의 일대기를 완성시킵니다.

 

 

길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서울 강북 지역에서 차를 운전해 전남 신안군 안좌도 읍동의 김환기 고택까지 가는 길은 멀었습니다.

 

6월 첫 주말 오후, 막히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 공주IC에서 서천공주고속도로로 빠졌습니다. 서천IC에서 다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무안IC에서 77번 국도를 타고 2019년 개통한 1004대교를 건너 압해도를 거쳐 안좌도까지 가는 길은 쉬는 시간까지 포함, 7시간 남짓 걸렸습니다. 1004대교를 건널 때 이미 사방은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안좌도의 인구가 한때 몇 천명을 넘었고 김환기 고택에서 멀지 않은 안좌초등학교는 개교한지 100년에 접어들만큼 역사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역의 쇠락을 안좌도도 피해가진 못했습니다. 읍동 읍내는 안좌도의 중심지였지만 소박했습니다.

 

김환기 고택은 읍동 읍내에서 찾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김환기 고택은 지난 3월부터 전면 개보수에 들어가 가림막으로 가려놓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수선한 고택 앞은 보름달이 가득 채워 아쉬움을 달래주었습니다. 고택 마당에서 바로 앞에 보이는 안좌도 안산 위로 뜬 보름달이 보였습니다.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김환기의 전시는 총 2부로 구성했습니다. 1부에서는 달과 달항아리, 산, 구름 등을 소재로 한 초기 작품들이 주로 선을 보입니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은 달과 달항아리였습니다. '김환기가 왜 달항아리에 빠졌을까?', '달항아리를 선호하도록 만든 안목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안좌도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 산 위로 둥실 떠 오른 달빛을 보며 놀았던 목가적 기억이 무의힉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고택 앞 마당을 몇 바퀴 멤돌며 생각해봤습니다.

 

별달리 놀 것이 없던 시절, 그저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의 변화와 달과 별의 움직임. 그리고 안좌도를 비롯한 서남해안 갯벌의 하염없는 밀물과 썰물. 이러한 삼라만상의 흐름과 순리에 맞춰 하루와 한달, 그리고 한 해를 사는 이들. 그 흐름과 순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거부되거나 작아지거나 소외당하는 시절을 김환기는 온몸으로 겪으며 살지 않았을까? 고향집에 앉아 보름달을 보며 달빛에 황홀했을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수화를 떠올려보았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만이 어둠 속에 점으로 빛나던 그 시절의 풍경을 수화는 당대 문명의 최전선, 수십층 고층 빌딩들의 마천루가 즐비했던 뉴욕에서 더 그리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상념은 구름에 사이 보름달빛과 함께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했습니다.

 

 

'한 점 하늘 김환기'전 2부에서 수화가 가로.세로 몇 미터 되는 커다란 화폭에 점 하나를 찍고 그 바깥의 선을 그리고 수없이 단순한 반복을 통해 완성해나간 뉴욕 시기 점화를 보면서 더욱 궁금했습니다. 왜 수화는 당대의 같은 한국의 추상주의 작가나 뉴욕의 추상주의 작가들과 다른 하늘과 별, 우주로 나아갔을까? 호암미술관 전시와 그 이전에도 보았던 수화의 점화 대작을 보며 떠나지 않았던 궁금증이었습니다.

 

안좌도는 압도할 풍경을 지닌 이름난 명승지도 아니었지만 신안의 섬 주변 조수간만의 차이로 매번 같은 듯 다르게 변하는 바다, 높지 않으나 멀리 수십 개의 섬들이 한눈에 보이는 마을의 산 언덕, 섬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한껏 누리는 새들과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 물질적인 풍요는 부족하더라도 능히 벅차는 무엇을 수화는 그리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문명의 세뇌를 받기 이전, 수화의 마음과 영혼에 각인 된 고향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추상으로 만들어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나.

 

수화의 고택 앞에서 달밤에 잠시나마 어슬렁거리며 내린 나름의 결론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결론은 무척 자의적이며 학술적으로더 엄결성이 부족한 그야마로 제멋대로의 감상입니다. 그렇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점화의 감동을 드디어 나만의 언어로 정리할 수 있어서 홀로 흐뭇했습니다.

 

이튿날 수화 고택 앞에서 바로 마주보이는 안산에 올랐습니다. 약 130미터 높이의 안산까지는 통신사 기지국이 정상에 있는 덕에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오르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상대로 신안군의 여러 섬들과 다도해 해상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썰물 때라 바다의 색은 적잖은 흙빛이기도 했고 먼 바다의 색은 '환기 블루'라 불리는 그 파란색이 살짝 살짝 비췄습니다. 이 산에 올라 수화는 스케치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1942년 매신사진순보에 발표한 ‘나의 아뜰리에’라는 글에서 “조선식 모옥도 없애지 않으려 하였고 집이 섬의 높은 곳에 있어서 어떤 창문으로도 다도해의 바다가 보이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수화가 당시 자신의 집 근처에 마련했던 아틀리에의 원형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수화가 신안 앞바다 풍경을 보며 적잖이 만족했던 듯합니다. 그 글에서 수화는 "섬에는 나의 아틀리에가 있다. 볏짚을 평평하게 이은 농가를 고쳐 만든 나의 아틀리에는 가난할 대로 가난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따뜻하게 느껴지고 무엇보다도 밝은 것이 장점이다"고 설명했습니다.

 

호암미술관 전시에 나온 작품들과 그가 남긴 메모들을 보면 생전 3000여점을 남긴 다작의 작가 이전에 수화가 얼마나 성실한 노동을 통해 작품을 만들었는지 능히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표현대로 새알같이 작은 기좌섬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문명의 성전이자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인 뉴욕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수화가 느꼈을 여러 감정의 여로와 그 길에서 싸우고 만들어낸 세계관의 결과물들이 하나의 큰 서사로 이어진다는 결론에 닿았습니다. 그 서사는 또 감상하는 이들마다 다를 것입니다.

 

수화는 고향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가 남긴 메모나 발표했던 글에서 적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는 선이 하늘까지 갔을까, 내가 찍은 점이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무지개보다 환해지는 우리 강산"(1971. 1. 27)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 마침 맑았던 유월의 하늘은 수화의 파란 전면점화처럼 총총히 깊어갔습니다. 어느덧 경부고속도로 천안을 지나면서 고속도로 좌우에는 어둠에 지지 않으려는 건물들이 촘촘히 불빛을 뿜어냈고 문명의 상징인 도시의 불빛들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저 불빛은 우리의 문명과 안전과 풍요를 상징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린 무엇을 잃거나 외면했을까?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고 시인 김광섭은 수화에게 엽서를 보냈고 수화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으로 화답 합니다. 그 작품이 바로 김환기의 전면점화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고 이 작품 역시 이번 전시에서도 중요하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뉴욕에서는 도시의 불빛에 가려 저렇게 많은 별들을 보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수화는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별을 그리지 않았지만 별을 보는 마음을 통해 우리의 존재까지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환기의 추상회화가 주는 힘이고 수화가 결론을 내린 한국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바로 그 예술이었을 것입니다. 서구의 추상화가 이성이나 지성 혹은 추상 그 자체에만 집중해 서사를 배제하고 맥락에서 독립하고자 했다면 수화의 전면점화는 결국 존재가 겪는 ‘내러티브’를 녹여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은 분명 그의 고향 신안 안좌도 읍동의 고즈넉한 한옥 마당이나 마루였을 것입니다. 거기서 꿈꾸었던 수화의 앞날과 인생. 이번 전시는 그런 면에서 수화의 일대기를 한 공간에서 비로소 반추해볼 수 있는 시작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의 제목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처음 자각한 그 시작점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일생을 거쳐 그 근원을 찾아올라가려는 노력과 변하지 않는 태도. 수화의 작품이 단지 최고 가격의 작품을 그린 작가로 소비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또 어떻게 작가와 작품을 매개로 소통할 수 있는지 고민과 함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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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운 기자 lucky@inth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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