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지은 보험설계사·칼럼니스트ㅣ사회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에겐 나이를 가늠하려 종종 언제 대학에 입학했는지를 묻는다. 직장에 다닌다고 하면 몇 년 차 인지를 묻기도 한다. 그런데 보험설계사의 셈법은 그와 다르다. 설계사의 경력은 ‘차월수(次月數)’로 갈음한다. 보험설계사로 등록한 후의 기간을 차월수라 하는데 경험과 신뢰가 중요한 영업의 세계인만큼 차월수는 설계사의 자질을 예상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2025년 4월에 발표한 금융감독원 보도자료에 따르면 현재 보험 영업에 종사하는 설계사의 숫자는 약 65만 명으로 2008년 기준 21만 명에 비해 3배나 증가했다. 전년도와 비교해도 7.8%가 증가했다고 하니 숫자로만 보면 보험설계사는 레드오션 시장이 맞다.
실제로 매달 수 많은 사람들이 보험설계사가 되기 위해 지점을 방문하고 교육을 받고 있으며, 보험시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데다. 수요도 그만큼 있다. 보험설계사는 정년이 정해져 있지 않은 직군에, 여성에게 유리한 면도 있어 100세 시대에 걸맞은 직업 같기도 하다. 나 또한 주변 사람에게 한 번 같이 일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한 적이 있고, 함께 일하게 된 설계사도 있다. 보험 영업은 무엇보다 문턱이 꽤 낮은 편이라 진입이 어렵지 않다는 장점도 있다.
나는 현재 98차월의 보험설계사로, 만 8년을 동일한 보험사에서 보험 영업을 해왔다. 그전까지는 보험과 무관한 직장에서 약 12년을 근무했고 단 한 번도 보험설계사가 될 거라는 예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설계사 대부분 사소한 계기로 보험 영업에 발을 들이고, 나는 당시 살던 곳과 보험 영업 사무실(지점)이 매우 가까우니 출퇴근이 편할 것 같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이 일을 시작했으니,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오래 일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속한 지점에는 약 80명의 설계사가 등록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80여 명 중 나와 차월수가 비슷하거나 더 오래 일한 설계사는 5명 정도로, 약간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살아남은' 자는 매우 소수다. 통계에 의하면 보험설계사 등록 후 13차월 정착률은 평균 47%라 하니, 낮은 진입장벽에 비해 정착은 절반도 못 하는 상황이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98차월이란 긴 시간을 버틴(?) 나로서도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찾듯 어느 한 가지로 답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게 영업직이 풀어야 할 숙제이리라.
보험설계사의 고용 형태는 정규직이나 계약직처럼 회사와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일정한 일을 맡아 수행하도록 '위촉계약'을 맺는다. 즉, 개인사업자와 비슷한 독립된 사업자라 프리랜서에 속한다. 그러므로 근로자 4대 보험(고용보험, 퇴직연금 등) 이 자동으로 적용되지 않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도 지역 가입자로 분류된다. 수입은 월급이 아닌 성과 수수료가 기반이라 만일 당월에 단 한 건의 계약도 체결하지 못하면 이론상 다음 달 수입은 제로가 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아마도 보험설계사가 그리 좋은 직업이란 이미지로 다가가진 않을듯하다. 매월 숨만 쉬어도 나가야 할 돈이 있는 현대인에게 보험 영업의 세계는 망망대해에서 무언가를 건져야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돌아보면 나도 지난 98개월을 어찌 지나왔을까? 싶으니. 다만, 그동안 수입이 0원이었던 차월은 없어서인지 그 비결을 알려달라는 질문을 왕왕 받기도 한다.
나는 보험설계사가 꽤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시작한 계기는 사소했지만 정년 없이 오래 일 할 수 있다는 점이 여전히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근로계약을 맺었건 위촉계약을 맺었건 일하며 돈은 번다는 점에서 직업의 종류는 달라도 일하는 태도는 다르지 않아야 하며,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가 분명 하다면 위촉직이란 핸디캡은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더 큰 수입이 목표고, 나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나이 들어서도 일하면서 꾸준히 수익을 내고 싶은 사람에게 보험 영업은 초기 자본이 들지 않는 리스크가 낮은 사업과 같다.
게다가 고객들의 인생과 재무적인 고민에 함께 공감하며 해결책을 찾다가 느끼는 보람의 순간은 셀 수 없이 많다. 직업 선택의 기준이 수입에만 있지 않는 한 일하면서 받는 성취감과 보람도 선택의 기준에서 제외하기 어려운 요소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다 보니 상처도 받고 설계사가 많고 경쟁이 치열해 거의 성사된 고객과의 계약이 어그러져 속상한 날도 있지만, 어떤 직업에서든 그런 상처와 영광은 있기 마련이다. 거쳐온 시간과 경험의 양만큼 의연함과 노련함도 함께 쌓이는 건 어느 분야나 비슷하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매달 바뀌는 수입이 아니라 보험 영업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어쩌면 그 편견을 바꾸고 싶어서 이렇게 오래 일하고 있는지 모른다. 편견이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듯 한 직업이 건네는 이미지 또한 한 번에 바꾸기 어렵다. 다행하게도 98개월 전 첫발을 내딛던 때와 지금은 보험설계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음을 체감하고 있다.
보험설계사는 보험사와 가입자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다리가 불안정하면 안심하고 건너기 힘들다.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는 시간이 차월수라면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서지은 필자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 말하고, 듣고, 씁니다. 장래희망은 최장기 근속 보험설계사 겸 프로작가입니다.
마흔다섯에 에세이집 <내가 이렇게 평범하게 살줄이야>를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