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소대장, 조장의 화가 풀릴 때까지 몽둥이로 맞았고 단체기합을 받았다. 강요로 구강성교를 한 사실도 있다. 낚시공장에서 바늘에 줄을 감는 일을 했고 운동장에서 돌 깨는 작업을 했다. 추운 겨울에 마대자루에 돌을 담아 매고 다닐 때 힘들었다. 노역의 대가를 받은 적이 없다. 3차례 도망가다가 잡혀서 많이 맞았다. 맞아서 죽은 사람을 여러 명 봤고, 상처를 제때 치료받지 못해 죽은 사람도 봤다.” -형제복지원 수용자 A(당시 12세, 1982년~1987년 수용)
“이사한 집을 찾지 못하여 부산역 근처 파출소에 가서 집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 C(당시 12세, 1981년 수용)
“열차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는데, 경찰에 의해 부산역 근처 파출소로 끌려가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 형제복지원 수용자 D(당시 20세, 1979년 2월~8월 수용)
출처:검찰 과거사 위원회
1931년 1월 생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된 만큼 전 대통령이란 호칭은 생략하고 전두환이란 고유명사로 지칭하겠습니다.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확인하며 후배들의 느낌이 궁금해 물어봤습니다. '나쁜 사람이 죽었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는 눈치들이었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광주 5·18민주화운동 때 민간인들을 죽였으며 끝내 반성하지 않았다' 정도였습니다.
8~90년대 태어난 후배들은 전두환의 독재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거나 독재를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시절 한국사회에 어떤 국가 폭력이 자행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었던 그 시절의 모습만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전두환이 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폭력에 기반한 공권력을 통해 초법적인 공포를 조장했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앞장서 불법적인 폭력을 조장했고 방임했고 무소불위로 휘둘러습니다. 국민들은 공권력 앞에서 굴종하고 굴욕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더러는 생명을 위협받았고 무고하게 죽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형제복지원 사건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 독재정권이 당시 한국사회 내 불법적인 폭력을 어떻게 방조했는지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18년 10월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내린 ’형제복지원 사건‘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산 북구에 설립된 사회복지법인인 형제복지원의 원장 등이 공모하여 1986년 7월경부터 1987년 1월경까지 경남 울주군에 있는 울주작업장에서 경비원과 감시견을 동원하여 수용자들에게 석축공사 등 강제노역을 시키고, 도망하거나 일을 하지 않으려는 수용자들을 목봉으로 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감금하고 가혹행위를 가하였으며(그 중 일부 수용자는 폭행으로 사망하였음), 부산 북구청으로부터 시설 운영비 및 구호비 등의 명목으로 받은 보조금을 횡령한 것에 대하여, 수사검사가 형제복지원의 인권침해행위(당시 수용자 3000여 명) 전반을 수사하려고 하였으나 검찰 지휘부, 정부, 부산시 등의 외압에 의하여 축소 수사를 하게 되었고, 축소된 공소사실마저 법원에서 대부분 무죄가 선고된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은 1987년 2월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조사단의 진상보고서를 통해 일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당시 진상보고서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수용자 연평균 약 3200명이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형제복지원 원장의 개인 목장, 운전교습소 등의 토지 평탄작업, 국유림 벌목작업, 울주작업장 석축작업. 낚시․재봉․스텐공장 작업 등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용자들은 중대, 소대, 조 등 군대식 체제로 편성되어 온갖 신체적 정신적 학대와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형제복지원 발간자료 및 신민당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연도말 수용자 합계 인원 2만1685명 대비 사망자 513명으로 수용자의 2.4%가 사망했습니다, 특히 1985년 말 무렵에는 수용자 3011명 대비 사망자 89명, 1986년 말에는 수용자 3164명 대비 사망자 95명으로 사망률이 3.0%에 이르렀습니다. 약 500명이 넘게 형제복지원 내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형제복지원은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의 실상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먼저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수용인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수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두환은 1981년 4월 88올림픽 개최를 위한 도시 정화를 목적으로 당시 국무총리에게 “근간 신체장애자 구걸행각이 늘어나고 있는바, 실태파악을 하여 관계부처 협조 하에 일절 단속 보호조치하고 대책과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지시합니다. 그 직후인 4월 20일부터 8일간 연인원 1만9300여 명의 공무원이 투입되어 1850명의 부랑인이 단속되었습니다.
문제는 실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수용자들은 가족 등 연고자가 있고 직장이나 학교에 다니던 사람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수용자 중에는 ‘막차를 놓쳐 역 대합실에서 잠을 자던 사람, 직장을 구하러 부산에 왔던 사람, 술에 취해 역 대합실 등지에서 잠을 자던 사람, 저녁에 귀가하던 학생, 집을 찾지 못하는 어린아이 등’이 있었고 이들은 박정희 독재시절 만들어진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의하더라도 수용대상인 부랑인이 아니었습니다.
즉 전두환 독재정권의 대한민국은 법률 근거 없이 국민들을 도시정화 등의 미명하에 형제복지원에 강제구금한 후 강제노역을 비롯해 폭행 등 가혹행위로 사망하는 일을 방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인 경찰은 국민들의 강제구금에 앞장서 나섰고 부랑인이 아닌 이들이나 경찰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까지 단속해 형제복제원에 수용시켰습니다.
형제복지원의 반인권적인 수용과 강제노역 및 인권유린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의 참상은 1986년 말 울산지청의 한 검사가 울주지역의 산을 등산하다가 우연히 수용자를 발견하면서 실상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언론과 야당의 폭로가 더해져 형제복지원은 수사 대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형제복지원 수사를 관할하는 부산지검 등 검찰 지휘부는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인권침해 수사를 무산시키려 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에 대한 횡령에 대한 수사를 중단시키려고 외압을 가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원장이 횡령한 금액이 확인된 액수만 10억 원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7억 원 이하로 공소장을 변경했습니다.
훗날 문재인 정부에서 이뤄진 진상조사에서 전두환은 법무부장관에게 검찰이 쓸데없는 일을 했냐며 박 원장을 풀어주라는 지시를 했다는 진술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진 박인근은 건축법 위반, 업무상 횡령 혐의만으로 징역 2년 6개월의 '솜방망이' 선고를 받고 형을 산 뒤 풀려났습니다. 특수감금 혐의는 무죄를 받았습니다. 이는 박인근이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1981년과 1984년 ‘부랑아 퇴치 공로’로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것과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검찰 과거사 위원회는 2018년 10월 10일 ‘형제복지원 사건 조사 심의결과’ 발표를 통해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에 대한 수용개시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으며 과도하게 기본권을 제한하여 위헌·위법함을 확인했다”며 “수용자들이 부랑인이 아님이 명백한 경우에도 위법하게 감금하였으며, 감금된 수용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키고 폭행,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아울러 당시 검찰이 “실체적 진실 발견과 인권보호 의무를 방기하고 형제복지원 울주작업장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는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수사, 원장의 횡령에 대한 수사 등을 방해하거나 축소하였으며, 형제복지원 본원에 대한 수사는 시작도 하지 않아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을 지연시켰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과거 정부가 법률근거 없이 내무부훈령을 만들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 국민을 형제복지원에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며 가혹행위로 인권을 유린했다”고 인정 한 뒤 “피해사실이 밝혀지지 못하고 현재까지 유지되는 불행한 상황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마음깊이 사과드린다”고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과거 정부가 바로 전두환 독재정부입니다.
전두환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공이 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공을 평가하기에 앞서 전두환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의 국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유린했고 어떤 식으로 공권력의 폭력을 조장하고 방임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이를 알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전두환 본인이 스스로 이에 대해 사과하고 사죄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역시 기억하고 알려야 합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한국사회의 은폐된 실상입니다. 이 사건 외에도 숱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사건이 재임기간 중 자행되었습니다. 전두환의 독재를 시민의 힘으로 저항해 물리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승리고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발판이 됐습니다.
경제발전 없이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의 실상을 우리는 중국을 통해 봅니다. 전두환은 한국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지연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공권력의 폭력을 자행했고 공권력의 폭력을 통해 시민들에게 굴종을 강제했습니다.
후배들에게 전두환 시절은 그저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과거의 지나간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의 독재는 불과 한 세대 전에 한국에서 자행되었던 현실이었고 그때 국가 폭력에 고초를 겪고 희생을 당한 이들은 여전히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독재권력의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이성과 지성의 노력입니다. 진보는 이에 대한 믿음입니다. 때문에 찬찬히 형제복지원 사건 외에도 전두환 시대의 국가 폭력과 독재의 참상을 상기하고 또다시 상기합니다. 이번만큼은 후배들에게 설령 꼰대소리를 듣는다해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5·18광주민주항쟁, 삼청교육대, 부림사건, 부천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외 숱한 대학생들의 죽음, 청계피복노동조합 탄압, 땡전뉴스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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