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김용운 산업부장ㅣ“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급급하고 어떻게 목민해야 할 것인가는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진구렁이에 떨어져 죽는데도 그들 사목된 자들은 바야흐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에 자기만 살찌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19세기 초반, 왕조 국가인 조선의 전직 관리가 왕의 미움을 받아 유배를 받습니다. 당대 엘리트였던 그는 저술 작업에 매진합니다. 그 저술 작업 중에 12편, 48권 분량의 책이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목민심서’입니다. 지방 관리를 위한 일종의 행정실무서였습니다. 저자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왕명을 받아 지역으로 파견된 수령들은 그 지역 내에서 왕 못지않은 권력을 위임받아 사실상 관내 모든 행정을 좌지우지했습니다. 그래서 정약용은 목민심서의 앞부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오히려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실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DB)
조선 후기는 권문세가의 세도정치 등으로 양반 관료제가 부패해 특히 지방에 사는 백성들의 반발이 누적되고 있던 시기입니다.
다산은 이런 시대 흐름에 개탄하며 지방의 목민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방대하고 촘촘한 지방자치행정 매뉴얼을 만든 셈입니다. 덕분에 민주주의 공화국인 지금 한국에서도 목민심서는 공무원들을 위한 필독서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조선시대 지방 수령관을 위한 업무지침서를 넘어 공공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이라면 명심해야 할 마음가짐 등이 명료하게 담겨 있어서입니다.
지난 10월 29일 밤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는 시민 140여명이 다치고 150여명이 숨지는 대형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좁은 이태원의 골목길에 핼로윈 데이를 즐기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중간에 낀 젊은이들이 압사당하는 참변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참사 이후 희생자들의 발인과 장례절차 등이 마무리되면서 정부는 참사에 대한 수사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고 밝혔습니다. 수사는 주로 이태원 참사를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행정시스템과 참사 당일 대처에 집중할 전망입니다.
목민심서의 여러 내용 중에 애민 제6조는 구재(救災: 재난구제)를 주제로 합니다. 재해와 재난 상황에서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를 명시합니다. 다산은 “환란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예방하는 것은 또한 재앙을 당한 뒤에 은혜를 베푸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고 말합니다. "불탄 것을 구하고 빠진 것을 건져내기를, 마치 내가 불에 타고 물에 빠진 듯 서둘러야 할 것이며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참사의 잔인한 본질은 어떻게 해도 참사로 희생된 분들의 목숨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사의 유일한 의미는 그래서 또 하나입니다.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 다시는 유사한 참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결국 살아있는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참사의 수습과 원인규명 및 책임자 처리 과정에서 어떤 공무원이 ‘우리’를 위하고 어떤 공무원이 ‘우리’를 위하지 않는지도 드러날 것입니다. 더군다나 수사를 하는 이들도 공무원이고 수사를 받는 이들도 공무원입니다 즉 공직자들이 어떤 결과를 내놓는냐에 따라 그들의 최종책임자에 대한 민심도 달라질 것입니다.
왕조 국가였던 조선이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이나 국가의 형태는 다르지만 민심의 거대한 변화로 국정의 최고권력 역시 달라졌다는 것을 역사는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