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더뉴스 김용운 기자ㅣ마흔 중반, 고향인 천년 고도를 떠나 항구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던 평범한 주부는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속으로 울음을 삼켰습니다.
해가 짧아져 겨울밤은 길었지만 마음은 그저 봄빛에 나온 새순들처럼 파릇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 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내가 쓴 언어들이 시일까?’ 고민이 깊었던 무렵이었습니다.
이영옥 시인은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당선작 '단단한 뼈'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2007년 첫 시집 <사라진 입들>(천년의시작)을 냈고 2014년 두 번째 시집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천년의시작)를 통해 시인으로서 한 걸음 더 내딛었습니다.
이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걷는사람)는 인생의 정점을 지나 어느덧 장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마주친 삶의 노정이 밀도 있게 채워져 있는 시집입니다.
<누구 울게 하지 못한다>에서 미학적인 소통보다는 삶의 비루함과 엄정함에 더 천착했던 시인은 더욱 세밀하고 단단한 시어를 통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탁류와 격류와 한류와 온류가 뒤섞여 흐르는 중년의 강을 건너갑니다.
그 강에서 눈으로 확인한 명도와 피부로 느낀 온도는 시들의 줄기에 저마다 다르게 각인됩니다. 그 다름을 통해 인생의 고됨과 소모되는 듯한 시간들이 역설적으로 다채로워지고 또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치매 걸린 어머니가 머무는 요양 병원에서 떨어지는 물휴지를 날아드는 새처럼 느끼기도 하고(무중력의 장소) 사람들 사이의 숱한 뒷담화 속에서 "인간은 소문을 생산하는 고단한 노동자/외로움은 소문이 양육하는 여리디여린숨(사피엔스)"이라고 짐짓 태연한 척 해봅니다. 지난 시절 뜨거웠던 사랑의 쇠락함을 “당신의 뒷모습은 갈수록 아름다워서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눈사람)고 돌아봅니다.
앞서 출간한 두 시집에서처럼 이 시인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시류나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시대의 전면을 받치고 있는 성실한 일상의 개인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입니다.
갈수록 들뜨고 책임 질 수 없는 현란한 언어들이 주목 받는 시대, 그 시대의 이면에서 자신의 내면을 상실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삶을 한층 더 명징하게 조명합니다.
그 명징함은 "나를 한 장 넘겼더니/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11월)는 고백처럼 허허롭기도 하겠지만 시집 제목처럼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는 삶의 숙명 속에서 앞으로 견뎌 나가야 할 일상에 대한 나지막한 예찬이 결국 시인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속마음 아니었을까요. 그 마음은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작품 <산책>에 사분사분 담겨있습니다.
-산책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게요
매일 하는 산책이지만
함께 걷던 꿈길을
나 혼자 걸어 나오면
애끓는 봄날도 지나가겠지요
우리면 어떻고 남이면 어때요
내가 스리슬쩍 나를 지나왔으니
당신도 스리슬쩍 당신을 지나가세요
눈물 뚝뚝 흘리는 동백일랑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또 보자 달래 주고
귓가에 묻어
눈가에 묻어
여기까지 함께 흘러왔으니
동네 한 바퀴 돌고 올게요
몇 세기가 걸리면 어때요
돌아오지 못한들 어때요
함께 울었던 날들은
꽃그늘 아래 세워두고
남은 세월 한 바퀴 돌고 올게요